충청병사 이장회(李長會)가 등보할 일은, “신의 병영 장졸 80명이 공주와 대전에서 전사한 연유는 전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 뒤에 살아 돌아온 자를 그 자리에서 조사하여 실제로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었습니다.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와 대관(隊官) 이종구(李鍾九)는 먼저 그들이 모인 곳에 들어가 귀화하는 글로 타일렀으나 완악한 저들이 강포하게도 무기를 빼앗자 죽음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큰소리로 적을 꾸짖어 끝내 칼을 뽑아 자결을 했습니다. 교장(敎長) 박춘빈(朴春彬)은 자기 두목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것을 보고 몸을 빼어 들어갔으나 구하지 못하자 돌에 머리를 부딪쳐서 자결했습니다.
이 3명의 죽음은 뜻을 굽히지 않고 모두 충성과 의리를 다했습니다. 법이 정한 포상과 추증의 전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병정(兵丁) 나용석(羅龍錫)의 아내 임소사(林召史)는 남편의 비보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가 끊겼는데 한 가닥 목숨이 어찌 아깝겠는가?’하고,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이웃마을에서 감탄하고 사림(士林)이 모두 호소하였습니다. 비천한 이런 집에 이런 탁월한 행실이 있는 것은 참으로 옛날에도 드문 일이고, 그것을 드러내려면 정문(旌門)을 빨리 세워야 한다고 하기에 실상을 조사해서 감히 임금께 아룁니다. 묘당(廟堂)이 품처할 수 있도록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니,
제내(題內, 등보에 대한 회신)에, “잘 받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