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이 첩보할 일은, “구원하러온 영관(領官) 구상조(具相祖)와 함께 10월 9일에 진천(鎭川)에서 청주로 달려간 연유는 전에 보고하였습니다. 며칠 머무르며 탐문해보았더니, 안성(安城)과 죽산 및 진천(鎭川)의 비류(匪類) 수만 명이 보은(報恩) 장내리(帳內里)에 모두 모여 날로 더욱 기세가 등등하다고 해서 죽산진(竹山陣, 죽산부사 이두황 휘하의 부대)과 합세해서 13일에 청주에서 갑절이나 재촉해서 보은에 갔더니 그들이 영동(永同)으로 피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장내리(帳內里)로 들어가서 적의 소굴을 불태우고 접주(接主) 백학길(白學吉)을 잡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경계하였습니다. 적들이 영동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죽산진은 바로 그 현으로 추격하게 하고, 영관(領官, 구상조)은 적을 막으려고 앞으로 와서 바로 회인(懷仁)으로 향해가다가 도집(都執) 유홍구(柳鴻九), 접주(接主) 윤경선(尹敬善), 접사(接司) 이승일(李承一)·우범손(禹範孫) 등 4명을 잡아 목을 베어 경계하였습니다. 또한 화약과 철창 및 미조(米租) 10여석을 찾아내어 군수(軍需)에 보태라고 해당 지방관에게 떼어주고, 16일에 문의(文義)에 도착해서 주둔했습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계문하려던 참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