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장이 첩보할 일은, “지금 막 도착한, 출전한 장위영 부영관(壯衛營 副領官) 죽산부사 이두황의 첩보에, ‘동도(東徒)가 충주(忠州) 무극장(無極場) 터에 모였다고 해서, 그들을 토벌하러 10월 9일에 죽산에서 떠나 음죽(陰竹) 돌원점(乭院店)에 도착했고, 10일에 무극에 이르렀더니 그들은 괴산(槐山)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바로 떠나 음성(陰城)에 이르러서 소식을 탐문했더니 그들이 괴산을 함락시켜 불태우고 바로 청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순무영(巡撫營)에서 청주를 구원하러 가라는 전령이 있는데다가 동도(東徒)가 청주로 옮겨갔기에 (청주를) 구원하고 (동도를) 토벌하러 11일에 청안(淸安)에 나아갔고, 12일에 청주에 도착했습니다. 경리청(經理廳) 장졸이 벌써 도착해 있어 모여서 계책을 정했습니다. 13일에 경리청, 진남영(鎭南營) 장졸과 함께 보은 장내리(帳內里)를 향해갔는데, 미원(米院)에 이르러 경리청 장졸은 그대로 머물러서 뒤에서 응원하고, 본진(本陣, 선봉)과 진남영 장졸은 바로 행군하여 5경(五更, 새벽 3시∼5시)에 보은(報恩) 귀현령점(龜峴嶺店)에 각각 도착하니 밤이 늦어 밤을 새어 14일 새벽녘에 고개를 넘었습니다. 진남영 장졸은 바로 보은읍으로 들어가고 본진의 장졸은 장내리로 들어갔더니 동도(東徒)는 벌써 11일에 청산(靑山)과 영동(永同)에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비류(匪類)가 묵은 초막 400여곳과 마을 200여호는 모두 비었고, 남은 자들도 산에 올라갔습니다. 3명을 찾아내어 바로 죽이고, 초막과 집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보은에 돌아와서 3영(三營, 경리청·진남영·선봉)의 장졸이 밤새 달려왔기에 사람과 말을 세우고 쉬게 했습니다. 16일에 떠나 청산(靑山)과 영동(永同)으로 가는 길에 회인현(懷仁縣)에 주둔했습니다. 그날 청주병영이 전령을 보내 지금 남적(南賊, 호남 동학군)이 노성(魯城)과 논산(論山)에 머무르고 있고, 순영(巡營)의 사개(使蓋)가 계속 오고 있으며 또한 임금께도 청할 것이니 신속하게 회군해서 하루가 가기 전에 가서 도우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날 받은 충청감영의 관문(關文, 공문)에, 호남 비류(匪類)가 무리를 이끌고 본 감영을 침범하러 와서 경각을 다툴 정도로 위급하니 귀영(貴營)이 군사를 내어 본 감영을 구원하도록 지금 임금께 아뢸 것이니 지체해서 오지 못해 탄식을 하게 된다면 군율에 해당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하러 17일에 회인에서 출발하여 공주 부강(芙江)에 이르렀습니다. 그날 밤 이어서 도착한 충청감영 관문(關文)에, 그대 병정을 뽑아 본 감영에 오도록 두 차례나 임금에게 아뢰었고 도순무영(都巡撫營)에도 보고했으니 반드시 윤허를 얻을 것이니 바로 갑절로 길을 재촉해서 행군하여 감영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8일에 떠나 연기(燕岐)에 이르렀는데, 공주(公州)와의 거리가 40리가 되어 형편을 살피려고 충청감영에 급히 보고하고 회답을 기다리며 주둔하였습니다. 각 영의 병정이 밤을 무릅쓰고 깊이 들어가서 소굴을 소탕하고 3명을 처벌한 것은 매우 가상하다고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바로 금영의 이문(移文, 관아 사이의 공문)에 따라 성하영(成夏永)이 인솔한 각 부대는 금영으로 연기(燕岐)에 주둔한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린 각 부대는 유성(維城)으로 가도록 양진영(兩陣營, 성하영과 이두황의 부대)에 전령을 보냈습니다. 연이어 받은 금영의 이문(移文)에 따르면, 안성군수 홍운섭(洪運燮)은 벌써 금강(錦江)에 도착해서 성하영이 인솔한 각 부대를 대신하여 지휘하고 있고, 성하영은 단지 1개 부대만을 거느리고 관할하는 곳이 없어 다시 홍운섭(洪運燮)에게 전령을 보내 경천(敬天) 등지로 가서 주둔하여 호남 비류를 막게 하였습니다. 노성(魯城) 등지에 비류가 운반한 식량을 탈취해서 군량으로 삼는 것이 중요한 임무라고 여겨 때에 따라 형편을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금영에서 공문을 보내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따라 명령을 내려 단단히 경계했습니다.”라고 하니,
제내(題內, 첩보에 대한 회신)에, “잘 받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