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관(召募官) 정기봉(鄭基鳳)이 첩보할 일은, “양성(陽城)에서 의병으로 포군(砲軍) 300여명을 모집하여 10월 19일에 안성에 이르러 밤에 행군하여 목천(木川)에 도착했습니다. 비괴(匪魁, 동학군의 우두머리) 김돌업(金乭業)과 최인성(崔仁成)등 2명을 추적해서 사로잡고 철추 1개를 찾아내어 엄중하게 조사했더니, 도소(都所)의 지시에 따라 탄환을 구하러 마을을 돌아다녔고, 당(黨)은 복귀정(伏龜亭)의 비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 쏘아 죽였습니다.
10월 21일에 세성산에 모인 비류를 토벌하여 했으나 군대를 출발시키기 전인, 그 날 오전에 죽산부사 이두황이 군대를 인솔해서 비류 5∼600명을 소탕했고, 나머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계속 추적해서 15명을 잡아 진중(陣中)에 가두었습니다. 10월 22일에 군대를 이끌고 목천에 도착해서 그들을 추적하여 괴수 장돌용(張乭用)과 안천복(安千卜)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두 놈은 노령(奴令, 지방 관아의 관노와 사령) 신분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본읍의 수령을 쫓아낸 자이어서 죽산부사 진중으로 압송하였습니다.
또한 4명을 잡았는데, 그 중에 양양득(梁良得)이란 자는 노비로서 상전(上典)을 욕보이고 마을에서 못된 짓을 하여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어 먼저 군율을 시행하였습니다. 나머지 18명은 진실로 압송해야 하지만 중도에 놓칠 염려가 있어 본진(本陣)에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군량은 비류에게서 얻은 쌀 80여석을 우선 사용했으나 벌써 여러 날이 지나 끊어질 지경에 이르니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제내(題內, 첩보에 대한 회신)-삭제에, “계문하려던 참에 (첩보가) 도착하였다. 잡은 놈들은 사실을 조사해서 처리하고, 장(張, 장돌용)과 안(安, 안천복) 2명은 어찌하여 바로 죽이지 않았는가? 더욱 그들을 토벌해서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