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도첨사(大阜島僉使) 장기렴(張基濂)이 첩보할 일은, “도순무영(都巡撫營)의 관문(關文)에 근거하여 지금 받은 순영(巡營)의 감결(甘結,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내리는 공문)에,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의 비류(匪類, 동학군)가 근래에 육도(六道)에 다시 퍼져 그 근심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들을 토벌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방도를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아니 된다. 군기(軍機)에 해당하는 모든 일은 해당 읍에서 본영(本營, 순영)에 바로 보고하고, 읍마다 각자 지켜서 조금이라도 소홀하여 군율에 저촉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근래 동도(東徒)가 더욱 늘어나는 폐단이 본진(本鎭, 대부도)에도 미쳤기 때문에 각 동(洞)에 지시해서 오가작통(五家作統)하여 한마음으로 그들이 위협하는 폐단을 막도록 했습니다.
9월 18일에 비류 11명이 덕산포(德山包)라고 하며 덕적(德積)에서 들어와 관사(官舍)에 들이닥쳐 (물건을) 빼앗고 백성을 선동하는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의리로 꾸짖어 마침내 물러갔지만 뒷걱정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받은 순영(巡營)의 감결(甘結)에, ‘위협을 당해 따른 자는 반드시 포고(布告)를 먼저하고, 거괴(渠魁)는 기일을 정해 토벌하라’고 했기 때문에 각 동에 전령을 보내 밤낮으로 엄중히 경계를 하던 중에 22일에 비류 20명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감사(甘辭, 감결에 쓰인 글)를 내보여 타일러서 돌려보냈습니다.
29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1시)쯤 비류 400여명이 배를 타고 본진 경내의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해서 마을사람을 결박하고 구타하여 섬 전체가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 사민(士民)을 모집해서 그들을 토벌하러 보냈습니다. 비도(匪徒)가 그 소문을 듣고 흩어졌는데, 200여명은 배를 타고 영종도(永宗島)로 떠났고, 나머지 200여명은 면천(沔川)과 덕산(德山)으로 갔습니다. 중히 경계하고 더욱 단속을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민정(民丁)을 징발해서 비류(匪類)를 토벌하니 매우 가상하다. 더욱 단속하고, 방비할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