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일러두기

홍주목사 이승우가 베껴서 보고함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가 등보할 일은, “새로 첨부해서 도착한 의정부 관문 안에 부(府, 의정부) 계사(啓辭)에, ‘홍주목사 이승우를 유임시켰는데, 병인년(丙寅年) 연안부사(延安府使)의 예에 따라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해서 호연(湖沿, 충청도 연안) 각 읍의 (동학군을) 토벌하는 일을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답하기를,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전교하신 뜻을 받들어 시행하겠으나 못난 신이 외람되게도 중임을 받아 밤낮으로 두려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호연 각 읍에 동학의 무리가 여름과 가을 이후로 점점 늘어나서 다시 창궐하여 작게는 마을을 침범해서 재물을 빼앗고, 크게는 수령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니 신은 근심스럽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엄중히 이교(吏校, 서리와 장교)를 단속하고 마을의 장정을 모아 한편으로 방어하고 다른 한편으로 토벌하였습니다.

10월 8일에 비류(匪類) 1,000여명이 수영(水營, 수군절도사가 있던 군영, 보령 소재) 무기를 탈취해서 결성(結成)과 광천(廣川)에 모였기에 군병 300명을 징발해서 추격하여 토벌하게 했습니다. 그들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10여명이고 사로잡은 자가 9명이며 군기(軍器)와 집물(什物)은 모두 거두어왔습니다.

또한 한 무리의 비류가 예산현(禮山縣) 무기를 탈취해서 그 곳 목소지(木巢地)에 집결하였고, 사방에서 동도(東徒)가 벌떼처럼 일어나 모여 그 숫자가 수만 명이 되어 기세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래서 10월 10일 3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쯤 날랜 창수(鎗手) 500명을 보내 기습해서 크게 격파하니 적들이 무너져서 흩어졌습니다. 포와 창에 죽은 자가 수십 명이고, 병기(兵器)와 집물(什物)은 모두 거두어 들였습니다. 다행히도 두 차례 거둔 승리는 전에 본도 감영에 보고하였고, 광천에서 사로잡은 죄인은 처분을 기다려 처리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초토(招討)의 명을 받들어 편의에 따라 일을 시행하였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사로잡은 9명중에 이우성(李右成)·최윤석(崔允石)·김인성(金仁成) 등은 지은 죄가 무거워서 10월 14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쯤 북쪽 성문 밖에 군민(軍民)을 대규모로 모아놓고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또한 한 무리의 비류가 당진(唐津)과 면천(沔川) 등지에서부터 마을 장정을 위협하며 합덕(合德)에 와서 모여 겁탈을 자행하고, 성(城)을 침범할 것이라는 소문에 사방이 어수선해서 아침저녁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0월 19일에 포수(砲手)와 창수(鎗手) 500명을 뽑아 습격해서 해산시켰는데, 총에 맞아 죽은 자가 수십 명이고, 사로잡은 자는 69명이며, 군기(軍器)와 우마(牛馬)는 모두 거두었습니다. 관군(官軍)은 다행스럽게도 한사람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사로잡은 자들은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려고 합니다.

면천(沔川) 숭악산(崇岳山)에 모인 적중에 이창구(李昌九)는 바로 호우(湖右, 충청남도)의 거괴(巨魁)입니다. 그 무리가 수만 명이어서 토병(土兵)으로는 토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죄를 용서하고 공(功)을 포상한다는 뜻으로 방(榜)을 내걸러 모집했더니, 10월 22일에 숭덕산 농보민(農堡民)인 이근영(李瑾永)과 김명배(金命培)가 저들 중의 강종화(姜鍾和)·편중삼(片仲三)·김영배(金永培)를 꾀어 계책을 세워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쯤 또한 성 북쪽 밖에서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다만 적들의 형세를 말씀드리면, 모인 무리는 대부분 위협에 억지로 따라와서 싸움에 나갔을 때에 바로 겁을 먹고 흩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무리가 진실로 번성해서 한 성(省)에 거의 퍼져있어 훈련되지 않은 토병(土兵)을 모아 곳에 따라 대응해서 토벌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숙청하는 것을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신(臣)의 식견이 얕고 짧아 또한 적의 공격을 막아 아름다운 명(命)을 드러낼 수가 없어 매우 근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연이어 출전한 장졸의 뛰어난 공과 획득한 군기(軍器)와 집물(什物)은 따로 갖추어 성책해서 올려 보내겠습니다.

초토사(招討使)의 인신(印信)은 아직 받지 못했으나 변방의 위급한 사태를 임금께 아뢰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에 홍주목사의 인신(印信)으로 성첩(成貼, 문서에 관인을 찍는 일)해서 우선 급히 보고하고 나서 등보할 것입니다. 출전한 장졸의 성명과 획득한 군기(軍器) 및 집물(什物)을 성책해서 올려 보낼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성책해서 바쳐라. 지난번에는 외딴 성(城)으로 우뚝하게 연해(沿海)를 지켜냈고, 이번에는 체제(體制)가 더욱 절로 특별하다. 우리 군은 일본군을 계속 기다렸다가 계획을 세워 힘을 합쳐 그들을 모두 숙청하도록 힘쓰라”고 하였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