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현감(砥平縣監) 맹영재(孟英在)가 첩보할 일은, “제가 홍천(洪川)에 달려간 연유는 전에 첩보하였습니다. 10월 21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 홍천 화촌면(化村面) 조개대(鳥介垈)로 들어가서 전진하는 적의 형세를 알아보려 했더니, 길이 끊겼기 때문에 창수(鎗手) 10명을 적들의 모양으로 꾸며 고깔을 씌워 먼저 보냈습니다. 비류 4명을 사로잡아 처음으로 장야촌(長野村)에 진을 친 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행군하여 총을 쏘아 잡은 자가 20여명입니다.
그 다음날 22일에 송치리(松峙里)로 들어갔더니,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할 뿐 아니라 적들이 사방에서 불을 놓아 거리를 구분하기 어려워서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이날 밤에 때에 맞춰 비가 내려 그 불이 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22일에 서석면(瑞石面) 어론리(魚論里)로 들어가는데, 100여명의 적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10여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승세를 타서 풍암리(豊巖里)까지 추격했더니 그들은 흙으로 보루를 쌓아 백기를 꽂고 수천 명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접전을 해서 한낮부터 저물 때까지 이어졌고, 포병(砲兵)이 승세를 타니 적들이 점차 무너져서 그대로 흩어졌습니다.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총에 맞아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습니다.
거괴(巨魁) 차기석(車箕錫)과 박종백(朴宗伯)은 그 이름을 들었으나 얼굴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로잡지 못해 법을 살펴 형률을 시행하지 못해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그대로 주둔하여 도망간 나머지 적을 일일이 토벌하였습니다. 비도(匪徒)가 저지른 흉악한 일을 들어보니, 평민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죽이거나 해치고 묻어버린 자가 많다고 하기에 제가 직접 그들이 흙으로 만든 보루를 가서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한 구덩이에 쌓인 시신이 8∼9명이나 되었으나 죽은 자의 거주지와 성명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평민이 매우 불쌍하게도 원귀(寃鬼)가 되어 글로 억울한 혼을 제사지냈습니다.
위협을 견디지 못해 (동학에) 들어간 자에게 모두 동일한 형률을 시행해야 하지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심문을 하고나서 배도표(背道標, 동학을 버렸다는 표지)를 만들어 각자 면(面)으로 돌려보내고, 한문과 한글로 전령을 보내 훈계해서 각자 돌아가 생업을 편안히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철군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계문하려던 참에 (첩보가) 도착했다. 정말로 서석의 승리는 가상하다. 다만 차(車, 차기석)와 박(朴, 박종백) 2놈이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계속 정탐하고, 귀화한 백성이 각자 생업을 편안히 하는 지도 역시 탐문하라”고 하였다.
경기감사 신헌구(申獻求)가 등보한 것의 사연도 위와 마찬가지이다.
제내에, “잘 받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