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병사(忠淸兵使) 이장회(李長會)가 등보(謄報)할 일은, “일본군이 교도소(敎導所) 군사와 함께 도착한 연유는 전에 급히 보고를 하였습니다. 20리쯤에 있는 문의(文義)에 집결한 수만명의 적들이 청주(淸州)로 향한다고 해서 일본군 대대(大隊) 병력 200여명과 교도대 200여명 및 신의 병영군사 100여명이 10월 26일에 함께 출군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병영(兵營) 우영관(右領官) 이용정(李容正)의 첩정(牒呈)을 보니, ‘10월 27일에 문의현(文義縣)에 갔더니 적들이 회덕현(懷德縣) 지명지(地明地)로 옮겨갔다고 하기에 추격하여 접전해서 한 번에 격파했고, 포에 맞아죽거나 다친 적들은 수십 명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28일에 다시 앞의 적을 정탐하러 3개부대로 나눠 출발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급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잘 받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