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중대장(敎導中隊長) 이진호(李軫鎬)가 첩보할 일은, “청주(淸州)에서 10월 26일 자시(子時, 오후11시∼오전1시)에 제가 인솔하던 병정과 일본군 대대 및 진남영(鎭南營) 병정 100명이 합세해서 회덕(懷德) 지명장(至明場)에 도착했더니,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는 저들이 물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어 적의 기세가 제법 기괴해서 한바탕 혼전(混戰)을 하여 수십 명을 죽였고, 나머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습니다.
사로잡은 동도(東徒) 13명 중에 정복기(鄭福基) 등 6명은 원래 농민인데 귀화를 사정하기에 모두 타일러서 놓아주었습니다. 박성엽(朴聖燁) 등 7명은 행패를 부린 단서가 많아 매우 흉악해서 문의면(文義面) 남장(南場, 남쪽 장터인 듯)에서 쏘아 죽여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소와 말 30필과 총·창·검·탄환·깃발·북 등을 획득했고, 여러 가지 긴요하지 않은 집물(什物)은 모두 불태웠습니다.
10월 20일에 죽산(竹山)에서 보낸 대관(隊官) 이민굉(李敏宏)이 1개 부대를 인솔해서 일본군 1개 부대와 합쳐 정탐대를 만들어 보은에 가서 비도(匪徒) 8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중에 접사(接司)라고 하는 안무현(安武玄)과 청안(淸安)에서 잡은 비도 6명 중에 접사(接司)라고 하는 윤대근(尹大根)·오덕배(吳德培)·이제삼(李齊三) 등을 모두 바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 나머지 10명은 타일러서 풀어주었습니다. 그 날 문의(文義)에 이르러 병대를 합세해서 공주(公州)로 향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계문하려던 참에 (첩보가) 도착하였다. 그 뒤에 형편을 계속 신속하게 보고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