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등보(謄報)할 일은,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 등이 병정 712명을 인솔하여 10월 27일에 신의 감영에 와서 주둔한 연유는 전에 급히 아뢰었습니다. 해당 부영관(副領官)은 휘하의 병정을 데리고 29일에 예산(禮山)과 홍주(洪州) 등지로 떠났습니다. 각처에 비도(匪徒)가 한결같이 창궐하여 도로가 막혀 지날 수가 없어 경군(京軍)과 일본군의 왕래를 각 지방관이 보고를 하거나 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연이어 진천(鎭川)·청주(淸州)·아산(牙山)·청안(靑安)·회인(懷仁)·신창(新昌) 등 6개 읍의 보고를 받아보니, ‘교도소(敎導所) 병정 450명과 일본군 340명이 지난 달 10월 22일에 진천(鎭川)에 왔다가 24일에 청주(淸州)로 떠났고, 교도중대장(敎導中隊長)이 1개 중대 240명과 일본군 280명을 인솔하여 10월 24일에 청주(淸州)에 왔습니다. 경군(京軍) 240명이 10월 24일에 아산(牙山)에 와서 묵고 다음날에 본현의 백석포(白石浦)로 떠났습니다. 경리청(經理廳) 병정 150명과 일본군 57명이 지난 달 10월 25일에 아산(牙山)에 와서 묵고 다음날 신창(新昌)으로 갔습니다. 교도소 대관(敎導所 隊官) 1명, 병정 157명, 일본군 43명, 통사(通詞, 통역) 1명이 지난 달 10월 23일에 청안(靑安)에 왔습니다. 교도소(敎導所) 병정 5명이 지난 달 10월 25일에 회인(懷仁)에 와서 묵고, 다음날 보은(報恩)으로 떠났습니다. 일본군 68명과 교도소(敎導所) 병정 145명이 10월 26일에 다시 회인(懷仁)에 와서 묵고 다음날에 문의(文義)로 갔습니다. 순무영 별군관(巡撫營 別軍官) 조중석(趙重錫)이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해서 신창(新昌)과 아산(牙山) 등지에 주둔하며 군기(軍器)를 지급해 주기를 요청하기에 신창현에서 내어 주었습니다”라고 하여 이와 같이 급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잘 받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