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등보(謄報)할 일은, “지금 예산(禮山) 수관리(守官吏, 아전의 우두머리인 듯)의 문장(文狀)에, ‘지난 달 10월 16일에 본읍의 군병이 비도(匪徒)에게 패할 때에 성(城)을 지키던 중군(中軍) 김명황(金命璜)과 이교(吏校) 20여명이 죽었고, 군병은 죽은 실제 수효를 알지 못합니다. 읍내에 불타고 파괴된 집도 그 수를 알지 못합니다. 공사전곡(公私錢穀)을 모두 탈취해서 27일에 바로 홍주로 갔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여(扶餘) 수관리(守官吏)의 문장에, ‘지난 달 10월 29일에 은진(恩津)과 논산의 비도(匪徒) 6∼700명이 뒤에서 들이닥쳐 관사(官舍, 관아)를 에워싸서 군기(軍器)와 화약을 빼앗고, 읍내 민가를 약탈하여 옷과 소를 남김없이 가져갔습니다. 그곳에 살던 백성은 새처럼 놀라서 쥐처럼 숨었고 다치거나 죽은 자가 많아 그 광경이 매우 처참했다’고 하였기에 급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구원병을 벌써 보냈으니 그 이후의 형편을 바로 알아내어 보고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