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承宇)가 등보(謄報, 공문을 베껴 보고)할 일은, “지난 달 10월 25일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쯤 일본 육군 소위(小尉) 아카마쓰(赤松國封)가 일본군 89명을 인솔했고, 장위영 별군관(壯衛營 別軍官) 김홍수(金弘秀)가 따라왔으며 통위영 교장(統衛營 敎長) 황수옥(黃水玉)이 본영(本營, 통위영) 병정 40명을 거느리고 한꺼번에 홍주에 와서, ‘10월 24일에 비도(匪徒)를 추적하여 당진(唐津)에 이르러 먼저 일단 집결한 그들을 격파하니 모두 도주해서 해미(海美) 여미장(餘美場)으로 향했습니다. 지세가 험하여 길이 끊기고 좁은데, 적들이 산을 점거하여 사방에서 에워싸 그 형세가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것을 상대하지 못한다)이어서 어쩔 수 없이 후퇴하여 여기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나사(邏史, 나졸인 듯)를 보내 적의 형세를 정탐했더니, 이보다 전에 태안(泰安)과 서산(瑞山)의 적이 장리(長吏, 수령)를 살해하고 군물(軍物)를 빼앗았으며 그 괴수는 유상태(柳相台)·이일성(李一成)·장광화(張廣華)·박덕칠(朴德七)·이병호(李炳浩)·한영필(韓永弼) 등이었습니다. 광천(廣川)·목소(木巢)·합덕(合德) 3곳에서 패해 흩어진 무리들이 그들을 따라 붙어 세(勢)를 이뤄 스스로 석권(席卷)했다고 하였습니다. 면천(沔川)과 덕산(德山) 등의 읍으로 흩어져서 마을을 만나면 재물을 빼앗고 불을 지르며, 사람을 보면 포를 쏘아 위협해서 하루만에 100리가 비었습니다.
예산(禮山)에서 적들이 지금 신례원(新禮院)에 모여 있다고 급한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신이 초토(招討)의 명을 받았고, 이웃 현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서 도우러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0월 26일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쯤 홍주의 총수(銃手)와 창수(鎗手) 600명을 뽑아 군관(軍官) 김병돈(金秉暾)과 이창욱(李昌旭)에게 인솔해서 나가게 했습니다. 일본군과 경군(京軍)은 뒤에서 돕고, 본주(本州, 홍주)와 이웃 경계의 사민(士民)이 모아온 의병 3,000여명이 성원(聲援)을 해서 함께 출발을 했습니다. 전군(前軍, 김병돈과 이창욱이 이끄는 부대)이 신례원(新禮院)에 닿기도 전에 갑자기 많은 적을 만났습니다. 김병돈과 이창욱은 본래 과감한 용기를 지닌데 다 여러 번 승리한 기세를 타서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마음으로 병법(兵法)에서 적을 가볍게 보는 금기(禁忌)를 어겼습니다. 먼저 크게 소리를 질러 격렬하게 싸웠으나 어찌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상대하겠습니까? 더욱이 저 유병(儒兵, 유생이 이끄는 군대)이 먼저 무너지고 적들은 철통처럼 에워싸니 고립된 군사가 견디지 못하고 끝내 패했습니다. 죽거나 다친 군졸이 37명이었고, 나머지는 각자 흩어졌는데, 김병돈과 이창욱은 적에 잡혔으나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신은 평소에 병법에 어두운데 외람되게 중임을 받아 진중(陣中)에서 깊게 살필 수가 없고, 출군(出軍)해서 지휘를 다 온전히 하지 못해 고립된 군대를 패하게 했으니, 원수(元帥, 장수)의 책임을 모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온통 두렵고 부끄러워 공손히 군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병돈과 이창욱은 정모(鄭蟊)처럼 먼저 나서 비록 승전의 공은 이루지 못했으나 상산(常山)처럼 크게 꾸짖어 충심과 분노하는 기개를 드러내었습니다.
한량(閑良) 한기경(韓基慶)은 16세의 어린 아이로 수만 명이 에워싼 곳에 들어와 싸움에서 발을 돌리지 않고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칼날을 밟는 담력이 있어 흉악한 적이 그를 잡아 칼로 눈을 없게 해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뛰어난 인재가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군관(軍官) 주홍섭(朱弘燮)·주창섭(朱昌燮) 형제는 한꺼번에 죽어 모두 절개를 온전히 했습니다.
그날에 일본군과 경군(京軍)은 도착하지 않고 패전한 곳 10리에서 갑자기 전군(前軍)의 패전소식을 듣고 구원할 겨를도 없이 바로 회군하였습니다.
28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1시)쯤 수만 명의 적들이 산에 가득하고 들을 덮어 성 아래에 까지 와서 먼저 성 밖의 인가(人家)를 불태우고 고립된 성(城)을 포위하여 그 기세가 대단하였습니다. 신이 모은 토병(土兵) 1,000여명을 성(城)에 둘러 세우고 정예 총수(銃手)와 창수(鎗手) 수백 명을 뽑아 일본군 및 경군(京軍)과 함께 요충지를 나눠 지키며 밤새 포를 쏘아 맞아 죽은 적들이 600여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의 기세가 조금 꺾여 성의 동북쪽 5리 밖으로 물러났습니다. 다음날 신이 군사를 격려하여 성을 나가 공격하려 할 때에 적들은 스스로 기세가 꺾였다고 여겨 한꺼번에 도망가서 흩어졌고, 성위의 군사는 적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각자 기세가 올라 성을 넘어 다투어 나선 100여명이 적을 추격하여 5∼600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게다가 소·말·포·창 등의 물건을 얻었습니다. 지금 이 고립된 성이 온전하고, 다친 관군이 없는 것은 임금의 위엄이 미친 대다가 이웃나라의 정예병과 예리한 기계(器械)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고 병사의 사기가 제법 나아졌습니다. 위에서 말한 난을 일으킨 적괴(賊魁)는 아직 잡지 못해 법망을 빠져나가게 되어 매우 분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꺼번에 도주하기 어렵고 감히 다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나 진실로 갑자기 그들을 깨뜨릴 수가 없기에 성을 지키는 것을 더욱 단속했고, 일본군과 경군(京軍)도 함께 주둔하였습니다.
불탄 인가는 285호인데, 궁박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시급하게 할 일이지만 온통 피폐한 읍의 처지로 이 한 달 동안 병비(兵備, 군대나 병기 등의 준비)를 겨우 조달해서 이미 활시위의 끝처럼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어리석고 못나서 전혀 구제할 방도가 없고 잿더미에 모진 삶이 눈에 가득차서 참담하여 어떻게 보호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송구스럽고 근심스럽습니다. 급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이번에 큰 승리는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비류(匪類)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계속 급히 보고하라. 죽산진(竹山陣)은 벌써 도착했으리라 생각되는데, 두 차례 일본군의 진퇴도 탐문하라. 황수옥(黃水玉)에게 연환(鉛丸, 납으로 만든 탄환) 100개를 먼저 보내고 바로 내어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