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가도사(忠淸假都事) 공주판관(公州判官) 박선양(朴宣陽)이 등보할 일은, “호남 비도(匪徒)가 퇴각한 연유는 전에 관찰사 박제순(朴齊純)을 거쳐 연이어 급히 아뢰었습니다.
11월 8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정각에 비도(匪徒)가 공주를 다시 침범하여 영내 가까이 왔습니다. 선봉(先鋒) 이규태(李圭泰)가 통위영 부영관(統衛營 副領官) 장용진(張容鎭)과 경리청 참영관(經理廳 參領官) 구상조(具相祖)를 나누어 보내 각각 2개 소대를 인솔해서 모두 일본군 수십 명을 분배받아 각 요충지를 자리 잡고 밤을 이용해서 방어를 했습니다.
충청중군(忠淸中軍) 백낙완(白樂浣)과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 등이 2개 소대를 인솔하여 이인(利仁)에 나가 지켰으나 영내 위급한 소식에 따라 지금 회군을 하게했습니다. 그 날 공주 월성산(月城山) 앞에 봉화가 5개나 타올랐습니다. 관찰사 박제순이 일을 보지 않아 신(臣)이 대신 급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그 뒤의 형편을 계속 신속하게 보고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