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할 일은, “지난 달 10월 29일에 금영(錦營, 충청감영)에서 떠나 광정(廣亭)에 도착한 연유는 전에 첩보를 했습니다. 11월 1일에 비 때문에 해당 점(店, 광정점)에 체류했다가 11월 2일에 떠나 35리를 가서 천안에, 3일에 30리를 가서 온양에, 4일에 30리를 가서 신창(新昌)에 이르러 적의 사정을 탐문했더니, 4∼50,000의 적들이 예산과 덕산의 역촌(驛村)에 나눠 머무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토벌하러 행군하다가 지나는 길에 시전동(柿田洞)에 모두 동도(東徒)가 거처하고 있다고 하기에 동민(洞民) 50여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잠시 동도에 들어갔다가 바로 등 돌린 자도 있고, 애초에 물들지 않은 자도 있었으나 그 중에 소요를 일으킨 7명은 예산역(禮山驛)에 데려가서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적의 사정을 탐문했더니, 적들이 본진(本陣)이 뒤따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해미성(海美城)으로 물러났기에 6일에 덕산 가야동(伽倻洞)에 도착하여 군관(軍官)들과 함께 20명의 병정을 데리고 일락치(日落峙)에 바로 올라갔습니다. 험준한 곳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해미성 건너편 10리 되는 땅에 깃발을 세우고 포를 쏘며 큰 규모의 적이 있어 그대로 일락치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바로 성의 북쪽에 가서 높은 산에 의지하여 내려보니, 진실로 적이 뜻밖에 나오고 적도 갑자기 대비가 없이 성을 버리고 사방으로 달아났습니다. 후군(後軍)을 교동(校洞)에 주둔시키고, 수십 명의 병정에게 성에 들어가 깃발을 세우게 하여 먼저 적의 사기를 빼앗고 나서 군대를 나눠 사방으로 내어 2∼30리를 추격하였습니다. 100여명을 사로잡고 쏘아 죽인 자도 40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병정을 거두어 들어가 획득한 군물(軍物)의 실제수효를 세어 적어서 성책(成冊)하여 첩보합니다. 장졸들이 여러 날 달려와서 아침 잠자리에서 밥을 먹고 밖에서 잠을 자며 그 고생한 것이 지극하여 바로 획득한 소를 잡아 크게 위로를 하였습니다. 계속 적의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쫓겨 간 나머지 무리는 산속에 숨거나 먼 마을에 자리 잡아 다시 일어날 염려가 있고, 또 나머지 무리는 당진(唐津)·면천(沔川)·서산(瑞山)·태안(泰安) 등지에 각각 모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력을 잠시 쉬게 하고 계속 토벌하려고 합니다. 지난달 10월 26일에 세성산(細城山)을 떠난 뒤에 처결한 동도(東徒)의 성명을 성책해서 함께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계문하려던 참에 (첩보가) 도착하였다. 여러 번의 승리는 매우 가상하다. 그 뒤의 형편을 계속 신속하게 보고하라. 금영의 형세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때에 따라 구원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