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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일러두기

충청가도사 공주판관 박선양이 베껴서 보고함

충청도 가도사(忠淸假都事) 공주판관(公州判官) 박선양(朴宣陽)이 등보(謄報)합니다.

11월 초 8일 중군(中軍) 백낙완(白樂浣),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河永) 등이 이인(利仁)에서 회군한 사유는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선봉장(先鋒)의 지휘로 성하영은 공주 우금치를 방어하고, 통위영 대관(統衛隊官) 오창성(吳昌成)은 금학동(金鶴洞)을 방어하며, 경리청 영관(經理廳 領官) 구상조(具相祖)는 능치(能陵峙)를 방어하며, 통위영 영관(統衛領官) 장용진(張容鎭)은 봉수대를 방어하며, 백낙완은 견준봉(犬蹲峰)을 방어하며, 공주진(公州鎭) 우영장(右營將) 이기동(李基東)은 주봉(周峰)을 방어하게 하였고, 일본군 대위 모리오 가이치(森尾雅一)는 동남봉(東南峰)의 산 위에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밤새 적병이 삼면을 포위하더니 초9일 과연 먼저 우금치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에 선봉장 이규태가 별군관(別軍官)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가 전쟁을 독려하였고, 일본 병사와 관군이 산꼭대기에 늘어서서 한꺼번에 4,50차 총을 쏘아대니 적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다가 탄환을 맞고 강시처럼 쓰러져 죽었습니다. 또 적병이 방향을 바꾸어 진영 뒤 견준봉과 주봉 두 곳을 치려고 하니, 병사들이 분발하여 격퇴하였습니다. 이어 우금치의 병사들이 추격하여 적의 주둔지에 이르러 대포, 군대 무기 및 깃발 60여기를 거두어 들였고, 모리오 가이치가 병사를 이끌고 십 수리를 쫓다가 돌아왔습니다. 이인(利仁)에서 포위를 풀고 나올 때에 경병(京兵) 중 다친 사람이 1명, 우금치 전투에서 경병과 토병(土兵) 중 다친 사람이 각각 1명인데,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동남봉에는 적들이 여전히 뭉쳐서 이틀 밤낮을 지키고 있으나 점차 물러나려고 하자, 능(能峙)에 주둔하여 방어하고 있던 경리청의 병사들이 군복 상의를 벗고 나무 등을 더위잡고 올랐습니다. 그들이 동류로 알고서 의심하지 않자, 병사들이 갑자기 총을 쏘아 대어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니 적들이 놀라서 흩어졌습니다. 이 때 또 대포 1좌와 군기 집물을 빼앗았습니다. 각 봉우리에 웅거하여 지키고 있던 적들도 또한 모두 흩어졌기에 현지 병사토병(土兵)들에게

머물러 망을 보라 하였습니다. 관찰사 신 박제순(朴齊純)이 임무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신이 대신 치계(馳啓)합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하였다. 이것은 큰 승리이다. 적도의 상황을 연속 치보(馳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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