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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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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장이 첩보함

선봉장이 첩보하는 일입니다. 통위영과 장어영 두 군영의 병정들이 이인(利仁)과 판치(板峙) 두 곳을 돌려가며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1월 초 8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경에 판치에 주둔하고 있던 경리청(經理廳) 참령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助)의 급보를 접수하니, “당일(當日)인 11월 8일 비도 몇 만 명이 경천점(敬川店)과 노성현(魯城縣)의 뒷 봉우리에서 산으로 올라와서 에워싸는데 졸지에 당해내기가 어려워서 효포(孝浦)·웅치(能峙) 등 높은 봉우리로 나아가서 진을 치라고 각별히 신칙하고 파수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차례로 도착한, 이인에 나아가 주둔하고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급보에서는, “비류 몇 만 명이 논산에서 고개를 넘어 공격해 오고, 또 몇 만 명이 오실(梧室)의 산길을 따라 뒤를 끊고 포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일본군 장교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출병하게 하였고, 또 파견되어 진영에 머물고 있는 통위영 병정 2소대를 나누어 보내서 지원하도록 보냈습니다.

이어 판치 진영에서 급히 보고하는 내용이 잇달았는데, 그 내용에 “효포·능치를 방수(防守)한 뒤부터 비도들이 산과 들에 가득하여 기세가 매우 대단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이인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진영에서 급히 보고한 내용을 접수하였는데, “두 방향의 적병을 힘을 다해 사살하여 앞 뒤로 적들을 격퇴시키고 10리 쯤 되는 우금치에 물러가 주둔하였는데, 그 때가 거의 술시(戌時, 오후 7시~9시) 경이었습니다. 우리 두 부대의 병정과 치중군(輜重軍, 보급부대)의 물품들은 손실이 없었으며, 좌 2소대의 병정 김명수(金明壽)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습니다. 지형이 불편할 뿐 아니라 병정의 후원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금치로 물러나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성하영 및 경리청 대관 윤영성(尹泳成)·백락완(白樂浣)이 소수의 병력으로 이인에 머물며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에서 몇 만 명의 비류를 죽이고 격퇴시켰으며, 병정들을 독려하고 신칙하여 군사를 온전히 후퇴시켜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만일 힘을 다해 몸 바치지 않았다면 이 승리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각처에서 방어하고 망 보는 일을 더욱 각별히 독려하고 신칙하였고, 일본군 장교도 친히 병정을 거느리고 우금치로 출동하여 함께 머물러 주둔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초 9일 새벽에 적도들이 갖가지 깃발을 두루 꽂아놓고 동쪽 판치로부터 봉황산 뒤 기슭에 이르기까지 3∼40리를 산위에 진을 펼치니, 그 기세가 매우 사납고 세찼습니다. 또 한 무리의 비도들이 10리 정도 떨어져 서로 바라보이는 높은 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는데,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며 항상 침범할 기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에 금학동을 방어하는 통위영 대관 오창성, 웅치를 방어하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洪運燮)·구상조· 대관(隊官) 조병완(曺秉完)·이상덕(李相德), 효포의 봉수대를 방어하는 통위영 영관 장용진(張容鎭), 대관 신창희(申昌熙) 등에게 특별히 신칙하여 각별하게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비류들의 움직임은 종일 출몰하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올라와서 시험해보고, 총을 쏘면 몸을 섬광과도 같이 번쩍 피하니, 우리를 유인하려는 계책이 아니라면 필시 자기편 군사를 응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들을 단속하는 것이 사살하는 것보다 배는 더 어렵습니다. 특히 우금치 서쪽과 남쪽 양쪽가의 적의 무리가 고함을 지르고 어지럽게 소란을 피우며 항상 침범할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저 군사를 신칙하여 주둔케 하였고,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이 일본 병사와 합세하여 나가서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경부터 여러 번 적을 사살하였습니다. 일본병사가 봉우리 위에 일렬로 진을 벌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총을 수십 차례 쏘아대니 적들이 사살된 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적은 많고 아군은 매우 적은 형세였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쯤이 되어도 격퇴시키지 못하니, 참모관(參謀官) 전 도사(前都事) 권종석(權鍾奭), 참모사(參謀士) 전 주서(前 注書) 이규백(李圭白), 유학 정도영(鄭道永) 등이 병사들을 신칙하여 용감하게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별군관(別軍官) 출신(出身) 이달영(李達榮)·송흠국(宋欽國), 전 만호(前萬戶) 이지효(李志孝), 전 감찰(前監察) 이재화(李在華), 전 부장(前 副將) 박정환(朴晶煥), 전 중군(前中軍) 이종진(李宗珍), 전 수문장(前守門將) 유석용(柳錫用), 사과(司果) 이흥교(李興敎), 본 진(陣)에서 차정(差定)한 군관(軍官) 전 오위장 황범수(黃凡秀), 유학 이주서(李周瑞), 사과 이선(李璿) 및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교장(敎長) 김명환(金命煥)·정재원(鄭在元)·정인갑(鄭寅甲)·장대규(張大奎)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몸소 올라가 앞장서서 독려하여 잇달아 총으로 사살하니, 그 숫자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비류들을 추격하여 쫓아내고 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높은 봉우리를 빼앗았으며, 군기와 대포 등의 물건과 여러 종류의 잡기(雜旗) 60∼70개를 탈취하였습니다. 일본군 대위와 일본병사는 중로(中路)를 따라 급히 추격하였습니다.

공주영장(公州營將) 이기동(李基東)은 충청감영의 수교(首校) 박준식(朴準植), 병교(兵校) 박춘식직(朴春植稙)·안재후(安在厚), 집사(執事) 김백현(金伯鉉)·양원길(梁元吉), 천총(千摠) 박순달(朴順達), 좌별장(左別將) 박춘명(朴春明), 우별장(右別將) 조광승(曺光承), 파총(把摠) 주시원(朱始元), 장무 군관(掌務軍官) 정평오(丁平吾)와 병정을 통솔하여 봉황산 뒷 기슭의 원봉(圓峰)을 파수하다가 몸을 떨쳐 군사를 이끌고 길의 오른쪽을 따라 추격하였습니다.

경리청 대관 조병완·이상덕, 참모관 황승억(黃昇億) 등은 백여 명의 병정을 이끌고 동쪽 길에서 왼쪽을 따라 돌격하여 힘을 모아 적들을 사살하고 10리쯤 추격했습니다.

경리대관 윤영성·백락완 등은 우금치 동쪽 최고봉을 방어하면서 연이어 먼저 올라온 몇 천명의 비류를 힘을 다해 총을 쏘아 죽여 비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는데, 날이 어두워져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진영으로 돌아와 결국 완전하게 토벌하지는 못했습니다.

참모관 전 학관(前 學官) 이구영(李龜榮), 유학 이승욱(李承郁), 전 사과 신효식(申孝湜)·이윤철(李潤澈), 별군관 전 부사 이필영(李弼榮), 전 오위장 김진옥(金振玉) 등은 탄환을 조달해서 보내주어 각 진영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고, 병정들을 감독하고 신칙하여 차례를 실수함이 없게 하였습니다.

공주감영은 큰 강물이 서북쪽에 가로질러 흐르고 산성이 동남쪽 험준한 곳에 의거하고 있어서, 단지 두서너 통로만 있기 때문에 비록 성첩 등 방어시설이 없더라도 본래부터 잘 지키고 막아낼 수 있는[保障] 땅으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런데, 아! 저 몇 만 명의 비류들이 4·50리나 둘러 뻗쳐 있는데, 길을 빼앗고 높은 봉우리를 다투어 차지하여 동쪽에서 소리 지르다가 서쪽으로 치달리며, 왼쪽에서 번쩍하다가 오른쪽으로 사라지니, 그들이 하는 짓을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섬뜩해집니다.

다행히도 일본군 대위와 각 진영의 장졸 및 종군한 여러 사람, 현지 병사들토병(土兵)과 민정(民丁)들이 힘을 다하고 용기를 내어 적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어놓았지만 아직 깨끗이 비적들의 흔적을 쓸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잔당들이 날뛰는 형세를 극히 애통스럽게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전처럼 지키도록 하여 더욱 힘써 적을 망보게 한 것입니다. 이같이 고립무원의 병력으로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밖에서 먹고 자면서 지낸지가 6∼7일이나 되었습니다. 큰 싸움을 겪은 뒤에 연이어 밤에 노숙을 하니 지극히 안타깝고 절박합니다.

경리청 좌(左) 2소대 병정 남창오(南昌五), 중(中) 2소대 병정 김관일(金寬一)은 몸을 바쳐 앞장서서 인도하다가 남창오는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고 김관일은 오른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습니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이에 어제 탄환을 맞은 병정 김명수와 함께 치료케 하였습니다. 전쟁에 이기자 성(城) 안 가득히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각각 기와 죽창을 가지고 기뻐서 춤을 추고 각 진영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울부짖고 한편으로는 환호하며 웃으니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서로 밝게 부합된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부상을 당한 병정과 몸을 바쳐 앞장 선 장졸과 참모군관은 비록 자신의 분수안의 직분을 다한 것이지만, 격려하고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당할 것 같은데, 감히 독단적으로는 처리하지 못합니다. 빼앗은 군수 물자는 책으로 엮어 위로 올려 보내되, 탈취한 군수물자를 부대로 가지고 와서 진영에 바친 병정들은 마땅히 별도로 구별하여 기록하여 보고합니다. 군관 전 오위장 황범수(黃凡秀)·사과 이선(李璿)·유학 이주서(李周瑞) 등은 우선 임금께 아뢰어 임명하여서 격려하고 본받게 하는 것이 형편에 합당할 듯합니다. 이후의 상황은 모두 차례로 치보(馳報)하겠습니다.

제(題): 장계로 아뢴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장관(將官)이 적개심을 품고 사졸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 일은 행군 이래로 최대의 승리이다. 지극히 가상한 일이므로 마땅히 포상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아직 잔당들이 아직 극성을 부리고 있고 괴수를 잡지 못하였으니, 앞으로 더욱 힘을 써야 할 때이다. 병사들을 진격시켜 적을 토벌하기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 각별히 도모할 것이며, 다친 3명의 병사는 각별히 구호하라. 이후의 상황은 계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요청한 3군관에 대해은 공을 세웠다고 포상하는 것은 다시 기다려라. 다시 공을 세우는 것을 기다렸다가 포상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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