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감사 정현석(鄭顯奭)이 첩보합니다.
지난 10월 25일 동도(東徒) 수 만 명이 성 가운데에 돌입하여 공공건물을 부수고, 군기(軍器)를 약탈하였고, 문서 기록부를 불 질렀는데, 11월 초4일에 이르러서야 모두 물러갔습니다. 형편없이 직책을 수행하다가 이러한 변괴를 당하게 되어 파직하라는 성은을 입게 되니 두렵고 떨려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적정(賊情)과 군정(軍情)에 관계되므로 규례대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1월 초8일에는 평양에 주둔하였던 일본 병사 200여 명이 해주감영에 들어 왔는데, 비적(匪賊)들이 물러나자, 일본병사들이 서쪽으로 추격해 갔습니다. 그 승패를 감영의 장교(營校)를 파견해서 정탐하였는데, 감영의 장교 정기언(鄭基彦)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11월 초10일 비류(匪類)들이 신천에서 대거 모인도회(都會)한다는 것을 일본병사들이 듣고 신천읍으로 향했는데, 길이 신천과 해주 경계의 문을 거쳐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비류의 거괴 임종현(林宗鉉)이 일본병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류 6,7천명을 이끌고 이른바 후영장(後領將) 김명선(金鳴善)을 선봉진으로 삼아서 위로 올라왔습니다. 일본 병사들은 먼저 고개 위에 올라갔기 때문에 몸을 소나무 사이에 숨기고 틈 사이로 비류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먼저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선봉진장 김명선이 말에서 뛰어 내려 먼저 도망쳤고, 적의 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또한 비류들 가운데 창을 거꾸로 잡고 임종현을 죽이려는 자가 있자, 임종현은 그대로 멀리 도주하였습니다. 일본 병사들은 이어 곧바로 신천에 들어가서 비류들을 만나 23명을 참살했는데,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고 합니다. 강령(康翎) 땅에도 한데 모여 있는 자들이 많아서, 해주감영에서 편비(褊裨) 1인과 교졸(校卒) 20명을 별도로 보내서 염탐하여 사로잡도록 하였고, 용산의 일본병사 70인은 오늘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쯤에 해주의 서쪽 취야장(翠野場)에 나아가서 강령으로 전진하였습니다. 접주 민경순(閔景淳)ㆍ민원장(閔元長)ㆍ이제석(李濟石) 등 세 놈은 우선 잡아서 11월 13일 남문 밖 훈련원에서 군민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민중들을 경계하였습니다.
제(題) : 도주한 임종현은 기어코 잡아들이고, 이후의 상황을 계속 급히 보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