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등보합니다.
면천수관(沔川守官) 고을 관리의 보고의 이문(吏文), 당진현감 윤우선(尹寓善)의 첩정, 진잠(鎭岑守官) 고을 관리의 보고의 이문, 한산(韓山守官)의 이문, 청주목사 임택호(任澤鎬)의 첩정을 잇달아 접수하였습니다. 면천은 지난 달 10월 23일 경군과 일본병사 130명이 본읍에 도착하였고, 24일에는 곧바로 당진(唐津)의 비류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적의 수가 매우 많아서 맞서 싸울 수 없어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홍주(洪州)로 갔습니다. 그날 24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쯤에 적도 수 만명이 읍에 돌입하여 관청을 부수고, 문서 및 아전과 백성들의 집을 불 지르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해가니 읍의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진은 비류 수 만 명이 당진현의 경내와 해미에 모였다가, 지난 달 10월 26일 당진현을 지나가는 길에 인가에 불을 질러 없애고 인명을 다수 살해하였다고 하기에 장리(將吏)를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적간(摘奸)하였더니 죽은 남자가 73명, 불탄 집이 9호이었습니다. 이에 해당 마을에 신칙하여 묻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진잠은 이 달 11월 10일 전라도 김개남(金介男開南) 포(包) 5,000여명이 금산과 연산 등지에서 읍으로 돌입하여 관청을 부수고 문서를 불태우고 환곡을 탈취하였으며, 민가의 살림살이를 혹 부수거나 혹 빼앗아 갔습니다. 유향소의 공형(公兄)이나 읍속(邑屬)은 구타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11월 11일에는 회덕과 청주 등지로 향해 갔다고 합니다.
한산은 11월 12일 비류 수 천 명이 읍에 돌입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방화하여 수백의 인가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다만 창고와 관청만이 겨우 화재를 면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적도들이 사방에 두루 돌아다니고 약탈하였습니다.
청주는 11월 13일 새벽에 호남비류 1만 여 명이 들어와 성 밖 3리까지 침범하였으나 병영의 병정과 일본 병사들이 토벌하고 쫒아가 체포하였으며, 살상함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또 진잠수관의 이문(吏文)을 보니, “이달 11월 13일 전라도 김개남(金介男開南) 포(包)가 5,000여명이 청주를 향해 돌아가는 길에, 밤을 틈타 갑자기 쳐들어 왔습니다. 이에 관속 및 읍민(邑民)들이 일제히 함께 궐기하여 돌을 가지고 싸워서 총 31자루, 말 4필을 탈취하였습니다. 이에 저 무리들은 연산 땅에 도주하였고, 관노 1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무리들이 모였다 흩어짐이 무상하여 이르는 곳마다 행패를 부리니 통분함을 이길 수 없어서 급히 아룁니다.
제(題) : 당진, 한산의 적들이 더욱 극성스럽게 창궐하니, 듣기에 매우 놀랍고 통탄스럽다. 이후의 형세를 상세하게 치보(馳報)하라. 진잠에서 아전과 백성들이 함께 궐기하여 접전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