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사(忠淸監司) 박제순(朴齊純)이 등보(謄報)합니다.
각읍(各邑)에서 비괴(匪魁)가 소란을 피우는 사유는 잇달아 치계(馳啓)하였습니다. 방금 청풍부사(淸風府使) 조관재(趙寬在)가 보낸 첩정(牒呈)을 받아보니 ‘10월 23일 동도(東徒) 1만10,000여 명이 본 청풍읍 서창(西倉)에 둔취(屯聚)했다가 충주(忠州)로 옮겨갔는데, 동월 10월 30일 통사(通詞) 5인과 일본병사 43명이 해당 마을로 추격해가서 대포(大砲)를 쏘고 불을 질렀습니다. 이에 민가(民家) 76호(戶)가 모두 불에 탔고, 서창에 보관해두었던 유고조 환자미[留庫條, 여유분으로 창고에 보관해 둔 것還米] 환곡쌀 57섬 11말도 불에 탔으며, 그 곳에 거주하는 홍대용(洪大用)이 대포의 탄환(彈丸)에 맞아 사망했는데, 도로가 막혀 이제서야 겨우 치보(馳報)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영동현감(永同縣監) 오형근(吳衡根)이 보낸 첩정(牒呈)을 받아보니 ‘10월 14일 동도(東徒) 6만여 명이 각각 총과 창을 휴대하고 영동읍에 와서 주둔하면서 군기(軍器) 및 환곡쌀자미[還米] 6섬, 탁지아문(度支衙門)에 납부할 계사조 전세목(癸巳條田稅木) 전세로 바친 무명 16동(同) 29필(疋), 친군영(親軍營)에 납부할 계사조 삼수목(癸巳條三手木) 훈련도감 경비 몫인 무명 6통 16필을 모두 탈취해 가지고 19일 옥천을 향해 갔는데, 11월 7일에 경군(京軍)과 일본병사 130여 명이 청산(靑山)에 서 영동현에 이르러 와서 생업에 안주하라고 거주민을 효유하고 11월 8일에는 금산(錦山)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11월 8일에는 병영(兵營)의 교졸(校卒) 및 병정(兵丁)․ 상민(商民)을 합한 250여 명이 또 청산에서 이르러 와서 동도(東徒) 3놈을 체포하여 총으로 사살하였으며, 11월 10일 황간(黃澗)을 향해서 갔다.’고 하였습니다.
또 목천현감(木川縣監) 정기봉(鄭基鳳)이 보낸 첩정을 받아보니 ‘현감이 기전소모관(畿甸召募官, 경기 담당)으로서 의사(義士)와 평민 포수를 불러 모아 곧바로 목천 고을에 이르러, 세성산(細城山)에서 흩어져 도망친 나머지 무리들의 뒤를 밟아 17명을 체포하여 모두 참작하여 처리하였고, 또 비류(匪類) 수백 명이 작성산(鵲城山)에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토벌하여 11놈을 사살하고, 11월 15일에는 청주로 출발했습니다.’고 하였으므로 치계(馳啓)합니다.
제(題): 등보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