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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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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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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이 첩보(牒報)합니다.

공주(公州)를 지원하기 위해 이달 11월 9일 해미(海美)를 출발해서 떠난 사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1월 10일에는 대흥(大興)에 도착해서 인하여 유회소(儒會所)가 지적해준 곳에서 동도(東徒) 19명을 체포하여 처단하고, 11일 공주 유구(維鳩)에 도착해서는 천안(天安) 의병소(義兵所)가 체포하여 보낸 동도 9명이 바로 유구에 사는 놈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공초(供招)를 받아보니, 이들은 이른바 충경포(忠慶包) 4, 5천명과 그날 밤 약속을 정하고, 경군(京軍)을 도살(屠殺)하고, 군기(軍器)를 약탈해가지고 장차 동도를 강북(江北)에서 성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야해서 습격해가지고 10여 명을 체포하고 다행히 그 화를 면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상세히 조사하여, 협박에 의해 따라다닌 사람은 석방하고, 거괴(巨魁) 27명은 사살하였고, 거괴(巨魁) 중에 전직 현령(縣令) 오정선(吳鼎善)은 바로 선봉진(先鋒陣) 소속 별군관(別軍官)이면서 동도의 도집강(都執綱)의 직임을 맡았다고 조사하는 자리에서 분명하게 직초(直招)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회답을 기다려 처치하려고 진(陣)에 잡아 수감해놓고, 공초한 내용은 선봉진(先鋒陣)에 첨부하여 보고하였습니다.

12일에는 행군하여 공주 동천리(銅川里)에 이르렀고, 13일에는 정산(定山) 경계의 건지동(乾芝洞)에 이르렀는데 바로 동도의 소굴이었습니다. 50여 명을 체포해놓고 보니 거괴는 이미 도망하고, 고의로 그들에게 적발하는 것을 행패를 놓은 자 6놈은 처단하였고, 남은 놈은 잘 타일러 경계하고 석방한 다음, 이어 정산 읍에 이르러 동도의 직명(職名)이 있고 행패를 부린 자를 염탐하여 10명을 체포하여 처단하였습니다.

14일에는 선봉진(先鋒陣)의 전령(傳令)에 따라 행군하여 이인(利仁)에 도착했고, 15일 자시에는 일본군 사관(士官)의 통지에 따라 또 다시 행군하여 용수막(龍水幕)에 도착하여 일본 사관(士官)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을 만나 보니, ‘장차 노성(魯城)에 있는 적(賊)을 잡기 위해 병사들을 세 갈래로 출동시키되, 본진(本陣)은 서쪽 길을 따라서 날이 밝기 전에 싸움터에 도착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듣는 즉시 행군하여 노성에 이르러 복병(伏兵)하고 적진을 멀리서 살펴보았더니 날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도 불빛이 주산(主山)에서 먼저 비추었으므로 아병(我兵)이 먼저 점거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대관(隊官) 이규식(李圭植)을 보내 일본군 사관(士官)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병정을 이끌고 전진하여 논산(論山)과 10리쯤 떨어진 곳에 도착해서, 일본병사와 통위병(統衛兵)의 병사들이 이미 논산으로 가고 있다는 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병사들을 재촉 전진하여 또 몇 리를 행군해서 가니, 포성(砲聲)소리가 들판에서 울리고 도둑들의 깃발이 적기(賊旗)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 병사들이 포성소리를 듣고 깃발을 보자, 낱낱이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여러 장관(將官)들이 길을 나누어 접응하여 토산(土山, 소토산임)의 적진(賊陣)을 탈취하고 도둑들의 깃발을 적기(賊旗)를 휘두르며 함성을 지르고, 본진 또한 일제히 소리를 질러 함성에 응하자, 주둔해있던 적들이 흩어져 도망쳐서 은진(恩津) 황화대(黃華臺)에 후퇴 점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차 다시 돌진해올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므로 본진(本陣)은 그대로 앞 언덕을 점거하고는 망원경으로 자세하게 살펴보니, 주위가 매우 넓고 적병들이 사방에 서서 각각 총을 교대로 쏘아, 그 소리가 각각 다르게 들리고, 원근에 빗발치는 탄환은 밤알이 떨어지듯 하였습니다. 분개하는 마음이 용감하게 솟구쳐 올라, 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경계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김진풍(金振豊), 별군관(別軍官) 윤지영(尹摯榮)․이겸래(李謙來)를 파견하여, 2개 부대를 이끌고 황화대 서쪽에서부터 그 서남쪽을 포위하게 하고, 반 개 소대(小隊)는 참영관(參領官) 원세록(元世祿)에게 붙여주어 의병(疑兵)을 만들어 거느리게 하고, 영관(領官)은 그대로 대관(隊官) 박영우(朴永祐)․이규식(李圭植), 별군관(別軍官) 김광수(金光洙)와 함께 3개 반의 소대(小隊)를 이끌고 황화대 동쪽 기슭을 따라 고함을 지르면서 올라가니, 서쪽에 주둔한 적병이 남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에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적병의 후미를 압박하고 사격하니 패배한 적 1천여 명이 별똥처럼 낙엽처럼 무너지고, 총과 창, 그리고 적의 시신이 눈에 걸리고 발에 채였습니다. 이때 해가 서산에 걸리고 바다 안개는 점점 일어나니 지는 해를 되돌리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이어 부대로 돌아오는 병사를 수습하여 황화대에 주둔시키고, 서리를 맞아가며 밤을 지냈습니다. 이날의 용병(用兵)은 실로 일본군 사관(士官)과 함께 올라와 본 사람이라면 모리오(森尾)가 마음을 쓰고 힘을 다한 것에 대해 실로 감탄했다고 할 것이며, 우리 병사들이 몸을 버리고 군령을 따른 것 또한 가상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튿날 모리오(森尾)의 지시로 노성으로 군사를 회군하던 길에, 은진 묵동(墨洞)에서 적병이 화약을 제조하는 장소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습니다. 이에 원세록이 거느린 군대를 나누어서 묵동에 진입시켜가지고 체포하여 죽인 자가 7명이었고, 나머지는 설득하여 석방하고, 화약을 제조하는 기구는 모두 부셔버렸습니다. 파쇄(破碎)하였습니다. 그리고 홍주(洪州)를 떠나온 이후 처단한 동도의 성명(姓名)은 책으로 만들어 보고 하고, 접전(接戰)할 때 총에 맞은 병정 김치순(金致順)은 공주판관에게 호송하여 치료하도록 하고, 이어서 이후의 상황은 다시 선봉진(先鋒陣)의 지휘를 기다려 거행할 생각입니다.

제(題): 계문(啓聞)하려던 때에 첩보가 도착했다. 김치순은 각별히 구호하라.

주석
의병(疑兵) 적이 식별하기 어렵게 적의 복장을 하고 적에 접근하여 혼란시키고 싸우는 병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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