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진이 첩보합니다.
곧바로 통위영(統衛營) 참영관(參領官) 장용진(張容鎭)이 보낸 첩정(牒呈)을 받아보니 ‘11월 14일 진시(辰時:오전 7시30분~9시30분) 경에 참모관 권종석(權鍾奭)이 별군관(別軍官) 유석용(柳錫用)․이지효(李志孝)․황범와수(黃凡瓦秀)․이주서(李周瑞) 등과 함께 행군하여 용수막(龍水幕)에 도착했다가, 선봉진이 공주에 돌아가 주둔한 뒤에, 일본군 대위(大尉)의 진(陣)과 더불어 각기 안배(安排)를 정하고, 당일 해시(亥時:오후9시30분~11시30분) 경에 일본군 대위의 지휘에 따라, 15일 자시(子時: 오후11시30분~오전1시30분) 경에 노성(魯城)의 동쪽 길로 출발해가다, 날이 밝을 쯤 비류가 둔취(屯聚)한 곳에 도착해보니 적막하여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에 총을 쏘아 신호하니, 봉수(烽燧) 뒤에 있던 일본 병사와 서쪽 길로 나아온 장위진(壯衛陣)이 일제히 호응하여, 추격하여 잡히는 데로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비류가 이미 논산으로 도망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길을 나뉘어서 뒤쫓아 가니, 과연 대촌(大村)·원봉(圓峯)에 깃발을 세우고 총을 쏘아대며 광경이 매우 놀라웠으므로, 독려하고 신칙하여 힘을 다해 고함을 치며 위로 올라갔더니 둔취(屯聚)했던 적들이 모두 달아나 흩어져서, 그 지역을 빼앗아 점거하고, 깃발을 휘둘러 호응하여 관군이 주둔해 웅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또 봉수가 있는 높은 봉우리에도 적들이 모여 있었고, 서로의 거리가 몇 3,4리 쯤 되었습니다. 인하여 승세를 틈타 일본 군병과 함께 힘을 합쳐 일제히 올라가서 빼앗아, 총을 쏘아 죽인 자도 매우 많았으나, 그 수효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10리쯤 전진하자 날이 저물어 군대를 정렬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니 적도들의 모습은 전연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곧장 호남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노성 가는 길에서 진영을 돌려 오강촌(烏江村)에 도착해서, 이곳에 탄약(彈藥)을 제조하는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그곳에 진입하여 탄약을 제조하는 기구와 갖가지 깃발 및 물건을 모두 아울러 파쇄하고, 이어 일본 대위(大尉)의 지시에 따라 경천점(敬川店)을 방수(防守)하였습니다. 각 부대의 장졸(將卒)들은 한 명도 상해를 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좌(左) 3소대 병정(兵丁) 이원근(李元根)․김계운(金啓云)․조용이(趙用伊)․김의환(金宜煥) 등은 맨 앞에서 용감하게 분투하여 적병의 기치를 빼앗았고, 김복용(金福用)은 적의 인신(印信)과 문서(文書)를 빼앗았으며, 집장(什長) 김수길(金守吉), 병정 김양일(金亮一), 화병(火兵) 최점동(崔點同) 등은 적진(賊陣)에 깊숙이 들어가 적의 군수품과 병기(兵器)를 빼앗았고, 대관(隊官) 오창성(吳昌成), 교장(敎長) 박상길(朴相吉), 규칙(糾飭) 김원석(金元錫)․이귀길(李貴吉), 집장(什長) 김봉두(金奉斗)․오성겸경(吳性謙), 중(中) 4소대 대관(隊官) 신창희(申昌熙), 교장(敎長) 황수옥(黃水玉)․김상운(金相雲), 규칙(糾飭) 박원식(朴元植)․홍복영(洪卜英), 집장 차흥규(車興奎)․김순일(金順一) 등이 앞장서서 적을 격파하자, 적진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노획한 각 항목의 군수물자는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잇달아 도착한 장위영 부영관(副領官) 이두황(李斗璜)이 보낸 첩정의 내용에는 ‘이달 11월 15일 자시(子時: 오후11시30분~오전1시30분) 경에 용수막(龍水幕)에 도착하여 일본군 사관(士官)의 통지에 따라 또 다시 행군하여 노성(魯城)에 이르러서 대관(隊官) 이규식(李圭植)을 보내 일본군 사관(士官)과의 약속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어 병사들을 재촉하여 전진케 하였는데, 일본군 병사와 통위병(統衛兵) 병사와 함께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나아가니, 모여 있던 적들이 흩어져 도망가면서 은진(恩津) 황화대(黃華臺)를 점거하였습니다. 장차 다시 돌진해올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본진(本陣)이 그대로 앞 언덕을 점거하였습니다. 망원경으로 자세하게 살펴보니 주위가 매우 넓고 적병이 사방에 서서 각각 총을 교대로 쏘아대는데, 원근에 빗발치는 탄환이 밤알이 흩어져 떨어지듯 하였습니다. 분개하는 마음이 용감하게 솟구쳐 올라, 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경계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김진풍(金振豊), 별군관(別軍官) 윤지영(尹摯榮)․이겸래(李謙來)를 파견하여 2소대를 이끌고 황화대 서쪽으로부터 그 서남쪽을 포위하게 하고, 반 개 소대(小隊)는 참영관(參領官) 원세록(元世祿)에게 붙여주고 의병(疑兵)을 만들어 거느리게 하였으며, 대관(隊官) 박영우(朴永祐)․이규식(李圭植), 별군관(別軍官) 김광수(金光洙)와 함께 3개 반의 소대(小隊)를 이끌고 황화대 동쪽 기슭을 따라 고함을 지르고 올라가니, 서쪽에 주둔한 적병이 남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에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적병의 후미를 압박하고 사격하니 패배한 적 1천여 명이 우수수 별이 떨어지고 낙엽이 지듯 했습니다. 총과 창, 그리고 적의 시신이 눈에 걸리고 발에 채였습니다. 이때 해가 서산에 걸리고 바다 안개는 점점 일어나니 드디어 황화대에 주둔시키고, 서리를 맞아가며 밤을 지냈습니다.
이 날의 용병(用兵)은 실로 일본군 사관(士官)과 함께 올라와 본 사람이라면 모리오(森尾)가 마음을 쓰고 힘을 다한 것에 대해 실로 감탄할만했다고 할 것이며, 우리 병사들이 몸을 버리고 군령을 따른 것도 또한 가상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튿날 노성 읍으로 군사를 회군할 때에 은진의 비류가 화약을 제조하는 장소를 찾아내어 모두 파쇄(破碎)하였고, 총상을 입은 병정 김치순(金致順)은 공주판관에게 호송하여 치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13일 도착한 정산(定山) 경계에 있는 건지동(乾芝洞)은 본래 적굴(賊窟)이라고 알려진 곳이었으므로, 그날 밤 오경에 병정을 파견하여 거주지를 포위, 습격하여 1백 여 명을 체포하고 심문하였습니다. 직임을 맡고 행패를 부린 자 10명은 처단했고, 나머지 놈은 모두 위협에 의해 추종하였기 때문에 효유하여 석방하였습니다. 이어 행군하여 이인(利仁)에 도착했습니다. 처단한 사람의 성명(姓名)은 책으로 만들어 보고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노성과 논산에서의 승리는 비록 괴수(魁首)를 섬멸하지는 못했으나 총살당한 사람, 익사한 사람을 합하면 3백 명이 넘고, 이미 목인(木印)을 빼앗았고 또 괴수의 깃발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저들을 흩트려 놓았다 하더라도 또 다시 호남에서 날뛰게 한 것은 참으로 극히 통탄스럽습니다. 힘을 다하고 목숨을 바친 각 진영의 장졸들은 포상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니,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현재 호서의 좌측 지역은 아직 둔취(屯聚)하여 다시 소요를 일으킨다는 보고가 없고, 다만 임천(林川)․한산(韓山)․서산(瑞山)․태안(泰安) 4개 읍(邑)은 아직 토벌하고 평정하지 못했지만, 이미 경리청(經理廳)에서 2개 부대 병정을 파송(派送)했으니 이후의 상황은 잇달아 급히 보고할 것입니다.
제(題): 계문(啓聞)하려고 할 때에 첩보가 도착했다. 장졸들이 선두를 다투어 적에 진격하여 누차 승첩(勝捷)했다는 소식을 아뢴 것은 매우 가상하다. 장령(將領)이 사졸(士卒)들을 격려하여 그 능히 몸을 바쳤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마땅히 포양(襃揚)하여 더더욱 분발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