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께 아룁니다.
“방금 선봉장 이규태(李圭泰)가 11월 18일 날 보낸 첩보를 받아보니 ‘통위영(統衛營) 영관(領官) 장용진(張容鎭)의 첩보에 「11월 15일 장위진(壯衛陣) 및 일본병사가 세 갈래 길에서 병사를 진출시켜, 노성 봉수봉(烽燧峯) 아래에서 비류를 사살하고, 논산 대촌(大村)․고봉(高峯) 두 곳을 추격하여, 매우 많은 무리를 사살하고, 또 적이 주둔했던 곳을 빼앗아 점거하고, 나머지 적들은 호남으로 도망하여 숨었다.」고 하였으며.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이 같은 시간에 보낸 첩보에 「노성에 진출했던 병정이 졸지에 은진 황화대에서 모여 둔취(屯聚)하고 있던 적을 만나서, 곧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김진풍(金振豊), 참영관(參領官) 원세록(元世祿)을 파견하여, 대관(隊官) 박영우(朴永祐)․이규식(李圭植)과 나누어 의병(疑兵)을 만들고 영관(領官)이 몸소 병정(兵丁)을 이끌고 곧바로 저 적이 주둔한 곳에 이르러 격살(擊殺)한 자가 족히 3백 명이나 되고, 그리고 밤에 정산(定山)에 당도하여 비류 10명을 체포하여 목을 베었 결과(結果)하였으며, 아병(我兵) 중 1명이 부상을 입고 치료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 빼앗은 군기(軍器)는 성책(成冊)을 만들어 올려 보냈습니다. 호좌(湖左)의 여러 고을 제읍(諸邑)은 근래 조금 깨끗하고, 임천(林川)․한산(韓山)․서산(瑞山)․태안(泰安) 4개 읍(邑)은 아직 토벌하지 못했으나, 경리청(經理廳) 군병 2개 소대(小隊)를 파견하여 선봉이 곧 호남으로 향할 차, 21일 다시 노성에 주둔하여 지숙(止宿)하였다.’라는 사연이었습니다. 빼앗은 군물(軍物)은 별단으로 바칠 생각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알았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