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현감(永春縣監) 신긍휴(申肯休)가 첩보합니다.
영춘현감으로서 지난 10월 27일 부임(赴任)한 뒤, 몸소 곳곳 방곡(坊曲)을 다니면서 직접 위엄을 보이고 위무하였으며, 계속 거듭 명령을 내려 그들이 동학을 떠나도록 하였는데, 마을에서 보고하거나 등소(等訴)가 있는 경우가 있어서 명표(名標)에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11월 초에는 각 처의 동도(東徒) 몇 천 명이 영월에 모여 있다고도 하고, 평창으로 옮겨갔다고 들었는데, 이후 다시 일본병사가 평창에 이르러 비류를 토벌하고 수백 명을 사살하자, 패배한 동도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들었습니다. 11월 8일에는 영춘현의 의풍 이임(儀豊里任)이 첩보하기를 ‘평창에서 패배한 적이 혹 5,6,7명, 혹은 십수 12, 3명씩 몰래 산골짜기로 다니면서 며칠 사이에 거의 수 백명을 모아가지고 곧바로 영남(嶺南)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11월 12일에는 정선(旌善)․평창(平昌)에서 회진(回陣)한 일본병사가 영월(寧越) 남면(南面) 중간 길에서 진(陣)을 나누어, 일대(一隊)는 영춘현 의풍리(儀豊里)와 대리(大里)에 들어가서 동도(東徒)인 장(張)씨가를 사살하고 연이어 주택 2개를 불태웠으며, 일대(一隊)는 영춘현 오사리(吾賜里)에 진입했다가 읍에 이르러 합진(合陣)하여 하루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 때 영월에서 체포한 동도 2명 또한 사살하였고, 또 영춘현 남천리(南川里)에서 요술(妖術)하는 사람 안영항(安昶恒)을 체포해서 11월 14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압송하여 단양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에 해당 진영의 인마(人馬)의 총 숫자 및 군관(軍官)이 휴대하고 있던 본 영의 문서(文書) 2통을 아울러 베껴서 등보(謄報)하였으며, 유진(留陣)할 때 제공했던 물종(物種)의 값도 성책(成冊)하여 올려 보냈습니다. 나머지 동비들의 모이고 흩어지는 상황은 순식간에 변화무상합니다. 사세(事勢)를 생각하면 참으로 걱정입니다.
제(題): 성책은 받았다. 병정이 지나간 이후 주민이 안도하게 하는 방안에 대해 힘을 다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