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진이 첩보합니다.
11월 20일 문서가 작성되어 올린 경리청부영관 겸안성군수(經理廳副領官兼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의 첩정(牒呈) 내용에, “11월 18일 은진에 도착하여 적(賊)의 형세를 염탐해보니, 각처에서 패배한 무리들이 모두 남쪽으로 내려가서 묘연하게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진에 거주하는 신현기(申鉉基)가 대장(大將)을 자칭하면서 5~6백 명의 무리를 모집하여 금산에서 소요를 일으켰다가, 키려고 하다가, 현재 자기 집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병사 1개 소대(小隊)를 출동시켜 대관(隊官) 김명환(金命煥), 교장(敎長) 정재원(鄭在元)으로 하여금 엄습하여 체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신현기는 아직 귀가하지 않아서 그의 아버지 신응균(申應均), 그의 숙부 신낙균(申洛均), 종형 신현구(申鉉九) 및 옥천(沃川)의 잔당인 원준상(元準常) 등 4놈을 체포하고, 쌀과 벼 그리고 화약(火藥)·연환(鉛丸)·조총(鳥銃) 등 물건을 수색해서 찾아냈습니다. 곡물(穀物)은 모두 실고 왔으며, 체포한 4놈은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이고, 쌀과 벼는 수량을 기록하여 일본군 진영에 보내서 군수(軍需)로 사용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해당 영관(領官) 홍운섭과 2개 소대(小隊)는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돌아가 주둔하였는데, 이미 지시를 받았으므로, 성하영(成夏永)이 돌아와 주둔할 때까지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경리청 참영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로 하여금 임시로 그 부대를 거느리게 하고, 홍운섭(洪運燮)은 23일 안성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위의 1소대(小隊)가운데 2분대(分隊)를 이끌고 나아가게 했습니다. 경기도의 안성·죽산, 호서의 진잠·목천에는 비류가 많이 흩어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에 금영(錦營)에 주둔하고 있는 2개 부대(部隊) 가운데 1개 부대를 안성읍에 파견하여 순찰하고 정탐하여 체포케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첩보는 도착했다. 금영에 주둔한 병사를 나누어 파견하는 것은 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