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진이 첩보합니다.
방금 도착한 장위영부영관 겸죽산부사(壯衛營副領官兼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의 첩정(牒呈)에, “11월 15일 논산의 적도(賊徒)를 격파하고 11월 16일 노성에 다시 도착한 연유는 이미 첩보(牒報) 치계(馳啓)하였습니다. 11월 18일에는 전령에 따라 행군하여 논산에 이르렀고, 11월 19일에는 일본군 사관(仕官)의 통지에 따라 행군하여 은진에 이르렀습니다. 11월 21일에는 또 일본군 사관의 지시에 따라 진중에 체포하여 수감된 유구(維鳩)거주 도집(都執) 오정선(吳鼎善) 필선(吳弼善) 및 비도(匪徒) 잔당 12놈을 모두 압송하였습니다. 그날 또 일본군 사관의 지시에 따라 본진(本陣)의 병사 100명을 나누어 아까마쯔 고쿠보(赤松國封)에게 부쳐주고, 석성에서 보령에 나아가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참령관 원세록(元世祿)이 거느리고 있는 부대 가운데 180명의 병사는 인솔한 해당 소좌(少佐)와 함께 은진에 주둔하게 하였고, 저는 2개 소대(小隊)를 이끌고 용안·함열에서 익산 삼례역에 이르러 일본 병사와 회합(會合)하기 위하여 11월 21일 행군을 출발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11월 25일 도착한 장위영 참령관 원세록의 첩정(牒呈)에는 “이번 11월 21일에 은진현에서 일본 대대장(大隊長)의 지휘에 따라 교장(敎長) 최기성(崔基成)·김인길(金仁吉)이 병사 100명을 이끌고 석성·보령 등지에 파견되었습니다. 11월 23일 새벽 미명(未明)에 또 해당 부대장의 지휘에 따라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이 병사 100명을 이끌고 먼저 만마관(萬馬館) 고개에 가서 방비하게 하였고, 대관(隊官) 김진풍(金振豊)은 병정 100명을 직접 이끌고 용두현(龍頭峴)에 가서 진을 치고 방수(防守)하게 하였습니다. 적도(賊徒)의 동정을 염탐하여 들어보니, ‘11월 23일 적도 3천명이 전주에서 도망쳐 금구로 향한다.’고 하기에, 일본 대대진(大隊陣)을 기다렸다가 11월 24일 진시(辰時: 오전7시~9시)에 함께 전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특별히 더 정탐하라.”고 제사(題辭)를 보냈습니다. 또한 일본군 진영에서 압송해온 동도의 성명을 성책(成冊)하고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
제(題): 첩보는 도착했다. 이후의 상황도 연속 신속히 보고하라. 성책(成冊)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