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사(忠淸監司) 박제순(朴齊純)이 등보(謄報)합니다.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이 서천(舒川)에서 적(賊)을 크게 격파한 연유는 이미 신속히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성하영이 공주에서 출진(出陣)한 이후 도로가 막혀 전후로 보고한 바가 이제서야 비로소 나란히 도착했으므로 이에 자세히 전말을 서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월 17일에 공주에서 떠나 11월 18일에 부여(扶餘)에 이르렀습니다. 11월 19일에는 홍산(鴻山) 경계에 이르러 1개 부대 병사를 풀어, 비도(匪徒)들이 기포(起包)한 곳을 포위하게 하고 동민(洞民)에게 비도(匪徒)의 거괴(巨魁) 5놈을 잡아들이게 하고, 해당 홍산현 고당리(古堂里)에서 체포한 2놈을 모두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11월 20일 한산에 도착하였는데, 11월 12일에 읍내의 인가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서 한편으로 어르고 달랬습니다. 또 서천(舒川)이 성이 함락했다는 보고를 듣고, 한산 수성장(韓山守城將) 김련(金鍊), 호장(戶長) 김하은(金夏殷)으로 하여금 수성군(守城軍) 및 읍속(邑屬, 고을 아전의 총칭) 수백 명을 이끌고 앞에서 이끌고, 홍산의 백성 최학래(崔鶴來)로 하여금 보부상을 이끌고 뒤를 따르게 한 뒤 스스로는 중진(中陣)에 있었습니다. 서천의 경계에 이르자 곧바로 적(賊)이 불을 지르고 후퇴하여 빠져나가서 병력을 2개 부대로 나누어 1개 부대는 산기슭을 점거하고, 1개 부대는 연포(沿浦)를 점거하였는데, 기치가 산에 가득하고, 대포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 이에 대관(隊官) 윤영성(尹泳成)·이상덕(李相德) 등이 각각 1개 소대(小隊)를 이끌고 위와 아래에서 협공(挾攻)하여 적 수 백 명을 죽이니, 나머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연포의 적 또한 이미 달아났습니다. 저물녘에는 한산에 진을 치고 주둔하여 수십 명을 사로잡아 죽였고, 깃발 12면, 총 10자루, 말 11필을 빼앗았습니다. 또 서천·한산 두 고을 경계를 순찰하여 23놈을 잡아 죽였습니다. 11월 23일에는 장위병(壯衛兵) 및 일본 병사를 만나 합진(合陣)했다가, 11월 24일 장위병 및 일본 병사는 임천(林川)으로 떠나갔다가 다시 호남으로 향하였으며, 본진(本陣)은 장차 서산(瑞山) 임소(任所)로 나아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경유하는 연로(沿路)에 계속 더 수색하여 체포하라.’고 제칙(題飭)하였습니다.
이어 한산수성장의 급히 아뢴 바를 받아보니 “읍내의 주택 2백여 호 및 서하면(西下面) 5개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불에 탔는데, 유리(由吏) 나종인(羅鍾寅)이 아전들과 백성들을 독려하고 이끌고 여러 개월 동안 성을 지키다가 마침내 비류에게 잡혔습니다. 항거하고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다가, 마침내 소살(燒殺)당했으니 참담한 마음 가누지 못하겠습니다.”고 합니다. 김련·나종인 등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누차 적병(賊兵)을 격파했는데, 김련은 경군(京軍)을 향도(嚮導)하여 힘을 합쳐 격파했으며, 나종인은 성심(誠心)으로 방어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모두 매우 가상합니다. 모두 권장(勸獎)하고 구휼(救恤)해주어야 하니 해당 아문(衙門)에서 보고해 처리품처(稟處)하도록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등보는 도착했다. 이후의 상황도 연속 보고하라.
(번역 : 김봉곤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