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사 이승우가 베껴 보고하는 일입니다. 연읍(沿邑)의 비도들이 본주(本州)에서 격퇴당한 뒤에 해미(海美)의 성 안에서 진을 치고 모여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달 7일에 본영(本營)의 군사를 동원하여 군관 박봉진(朴鳳鎭)에게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도 같은 날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해미에서 합류하자 적도들이 서산(瑞山)의 지경으로 달아나 진을 쳤습니다. 이에 경병(京兵)과 본영의 군사들이 8일 밤에 입에 나뭇가지[銜枚]를 물고 나아가 쫓아가 습격하면서 대포를 발사하여 (적의) 한 부대를 크게 죽였습니다. 적들이 곧 무너져 흩어졌으나 산이 험하고 밤이 어두워 북쪽으로 쫓아갈 수 없어서 즉시 해미로 회군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소위 사이토(齊藤溫)가 병사 50명을 거느리고 9일에 해미에 도착하여 아군이 사로잡은 적 41명을 총살하고는 5일 동안 머무르다가 본주(本州)로 되돌아 왔습니다. 경영의 병정은 9일에 해미를 출발하여 10일에는 대흥(大興)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본영의 병사들은 12일에 회군하였습니다. 해미와 서산, 태안 등 세 읍의 백성들이 모두 유회(儒會)를 앞장 서 열었으며, 아울러 비도들 중에서 숨은 자와 도망자를 색출하는데 뜻을 두어 서로 다투어 쫓아가 잡은 자들이 131명입니다. 이에 따라 하나하나 취조하여 (죄의) 경중을 나누어 참작하여 처결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최동신(崔東臣), 박윤일(朴允一), 옥출곤(玉出崑), 문학준(文學俊) 등은 모두 본주 출신으로 난적(亂賊)의 전모(前茅)가 되어 성을 침범한 자들입니다. 이병호(李炳浩)는 해미 동도(東徒)의 접주(接主)로 해미읍의 무기를 빼앗고 성을 점거한 자입니다. 김낙연(金樂璉)은 태안(泰安)의 아전으로 있다가 퇴직한 자로 그곳 수령을 죽이려고 모의한 자입니다. 이 달 21일 미시(未時, 오후 1~3시) 쯤에 북쪽 성문 밖에서 군사와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모아 놓고 위에 열거한 자들을 모두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해미와 서산, 태안 등 세 읍은 동도의 소굴로 그 우두머리들은 거의 다 법에 따라 처리되었으며, 위협을 받고 따랐던 자들은 거의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본도를 침범한 호남의 비도들이 아직 다 소탕되지는 않아서 나머지 경계해야 할 일이 시급하오니 황송하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급히 보고합니다.
제(題): (보고서가) 도착하였고, 이미 여러 날이 지났다. 그 이후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 참으로 울적하고 근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