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 달 21일에 용안(龍安)으로 군사를 보낸 이유는 이미 보고를 올렸습니다. 2개 반(半)의 소대가 일본군 장교사관(士官) 아까마쯔 고쿠보(赤松國封)와 함께 보령(保寧)으로 향하여 나아갔지만, 길이 서로 엇갈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관(領官)이 거느렸던 부대는 당일에 용안에 도착하였고 22일에는 나포(羅浦)에 도착하여 동도(東徒) 몇 명을 정탐하여 붙잡아 처리하였으며, 책자로 만들어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23일에 또 일본군 사관의 지시로 강을 따라 내려가 서포(西浦)를 수색하여 임피(臨陂)에 다다랐고, 24일에는 삼례(參禮)를 향하여 진군하다가 익산(益山)에서 일본 병사가 머물렀는지의 여부를 타진하여 들어 보니, ‘23일에 (일본 병사가) 이미 전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25일에 진군하여 전주에 이르러 아군과 일본군 소좌(小佐)와 회합하였습니다. 다만 미나미 쇼고시로(南小四郞)의 용병술(用兵術)을 관찰해 보건대,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할 때에 분병(分兵)과 합병(合兵)에 이치가 있고, 멀고 가까움을 (이용하는) 방도가 있었습니다. 혹 10명이나 혹은 30~40명으로, 혹 반일정(半日程, 한나절 걷는 거리)이나 혹은 하루 이틀 일정으로 배회하고 어정거리면서 여러 고을을 돌며 (지리를) 완전히 파악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수색하고 한편으로는 습격하는데, 그 명령이 매우 은밀하여 옆 사람도 알 수 없었습니다. 파견한 군사가 자주 드나들고 군인의 수가 많고 적음이 같지 않았으며, 길이 구불구불한 곳에 임무를 맡겨 부리는 일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 계책이 신묘하여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단지 대략의 줄거리만 들어 계속 급히 보고할 예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제(題):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