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사 정의묵이 등보해서 베껴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신이 본디 재주가 없이 성은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노모가 죽을 날이 가까워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을 하여 멀리 떠나지를 못하고 궁벽한 산속에 엎드리고 있으면서 한갓 성상을 그리워한 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영남소모사(嶺南召募使)의 명령을 받았으니 어리석고 미천한 신이 어찌 그 직분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명분과 의리로 보아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바로 일어나서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조령큰 영(조령[鳥嶺]을 말함) 이남은 본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성인의 교화를 흠뻑 받고 어진 선비들의 가르침을 익히며, 선비들은 바른 것을 좇아서 백성들은 그 풍속이 순박하게 되어 울연히 국가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일종의 요괴와 같은 것들이 동학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내어 부신(符信)과 주문(呪文)으로 속이고 도참설(圖讖說)을 억지로 끌어다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을 유혹하고 무리를 모으다가 끝내는 성읍을 불태우기에 이르렀습니다. 난(亂)의 형세가 이미 드러났으니 이 무리들을 남김없이 섬멸해야 마땅하지만, 성은(聖恩)은 하늘처럼 커서 차마 죽이지를 못하고 여러 차례 덕음(德音)을 내려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완고하여 곳곳에서 다시 창궐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국나라가 있던 이래 처음 있는 극악한 도적입니다. 신은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의병을) 규합하여 도적들을 소탕할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방(榜)을 내걸며 설득하여 각자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였습니다. 10월 19일에 상주(尙州)에 도착하여 거괴(渠魁) 강선보(姜善甫), 강홍이(姜弘伊), 김경준(金京俊) 등 3명세놈을 붙잡아 엄중히 조사하였습니다. 그 뒤 11월 초 7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쯤에 신은 상주목사(尙州牧使) 이만윤(李晩胤), 영장(營將) 유인형(柳寅衡)과 함께 개좌(開坐)를 하여, 강선보는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하고 강홍이와 김경준은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이 달 14일에는 선산부(善山府)에 가서 적괴(賊魁) 신두문(申斗文)을 체포하여 그 고을의 부사(府使) 윤우식(尹雨植)과 함께 군사와 백성들을 크게 모아놓고 즉시 그를 총살하였습니다. 상주 고을에서 빼앗긴 무기를 다시 거두어들였는데, 총 83자루, 창 33자루, 환도(環刀) 15자루였습니다. 그밖에 위협에 못 이겨 따라간 무리들 가운데 마음을 고쳐먹고 귀화한 자가 1,630명인데 방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참작하여 결정할 것입니다. 본 고을의 유생(儒生)과 백성들은 소문을 듣고 팔을 걷어붙이며 신속하게 단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정예들로 별포군(別砲軍)을 설치하여 200명을 두어 위급한 때에 활용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군량은 그 사이에 부호(富戶)들이 의로운 마음으로 군량을 내어 목전의 시급한 문제들은 해결하였지만 계속 버틸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벌써부터 매우 걱정이 됩니다. 이 달 17일에는 도신(道臣, 관찰사) 조병호(趙秉鎬)와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원부사(昌原府使) 이종서(李鍾緖), 대구판관(大邱判官) 지석영(池錫永), 인동부사(仁同府使) 조응현(趙應顯), 거창부사(居昌府使) 정관섭(丁觀燮)도 모두 소모사(召募使)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부근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맡아서 방어하는 방법을 마련하였습니다. 신이 맡은 고을은 안동(安東), 상주(尙州), 청송(靑松), 순흥(順興), 문경(聞慶), 예천(醴泉), 영천(榮川), 풍기(豊基), 의성(義城), 용궁(龍宮), 봉화(奉化), 진보(眞寶), 함창(咸昌), 예안(禮安), 영양(英陽) 등 15개 고을입니다. 신은 즉시 이들 고을을 순시하여 보고할 계획입니다. 다만 이 고을들을 규찰한다면 상세하게 살피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 응교(應敎) 장승원(張承遠), 유학(幼學) 강석희(姜奭熙), 박해조(朴海祚), 조희우(曺喜宇) 등 4인을 자벽(自辟)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습니다. 22일에는 상주로 돌아와서 거괴(渠魁) 남계일(南戒一), 손덕여(孫德汝), 최선장(崔善長), 이의성(李義城), 장판성(張判成), 피장(皮匠) 억손(億孫) 등 6명여섯놈을 붙잡았습니다. 24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쯤에 상주목사 이만윤(李晩胤), 영장 유인형(柳寅衡)과 함께 개좌(開坐)하여 이들을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부근 여러 고을에서는 비류들이 일단 사라졌습니다. 다만 이곳 토지가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와 연접하고 있으며 적괴(賊魁)가 출몰하고 있어서 영남이 온통 독(毒, 동학)에 물들었으니 그들을 소탕하는 방법은 다른 고을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본주(本州)의 유학 김석중(金奭中)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고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여 일개 부대를 통솔하여 흉괴(凶魁)들을 섬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편의에 따라 그를 유격장(遊游擊將)으로 차출하여 정예 포군 20명을 주었는데, 김석중은 용감하게 전진하여 거괴(巨魁) 구팔선(具八善), 김군중(金君仲), 유학언(兪學彦), 조왈경(趙曰京), 정순여(鄭順汝), 서치대(徐致大), 김자선(金子仙), 김민이(金民伊), 원성팔(元性八), 김달문(金達文), 강만철(姜萬哲), 김철명(金哲明), 이용복(李用卜) 등 13놈을 잡아 일일이 공초를 받고 사정을 알아낸 뒤에 시장장시에서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기뻐서 복종하였으며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급히 보고드립니다.
제(題): 담박(澹泊,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영정(寧靜, 편안하고 고요함)하지 않으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오늘날 서로 힘써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 고을을 나누어 돌아다니면서 부호들에게 곡식을 빌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