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진(先鋒鎭)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28일에 전주(全州)에서부터 전진한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같은 날 원평(院坪)의 거리(巨里)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지난 25일에 적을 소탕한 뒤여서 가게와 민가의 물건 등이 잇달아 불에 탔는데 40여 가구나 되었습니다. 비류들이 쌓아둔 곡식 몇 백 섬도 모두 불에 탔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서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집에 임시로 머물게 하면서 차츰 집을 지어 머물며 살 곳을 마련하고 각별히 잘 타일렀습니다. 이어서 태인(泰仁) 석현점(石峴店)에 도착하니 수십 채의 민가들이 또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아직도 가득하였습니다. 장위영(壯衛營)의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과 이규식(李圭植)이 소대를 이끌고 원평을 후원하고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수천 명의 비류를 토벌하였는데, 총살하고 생포하고 획득한 물건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곳 가게의 앞길에서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세한 전황을 대략 들었습니다. 이어서 행군하는 부대와 함께 그곳 고을에 도착하니 수백 여 채의 집들과 관아의 건물들이 모두 텅 비어 있었습니다.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서 모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마침 비류가 쌓아둔 곡식이 남아 있어서 이것으로 각 진영을 먹였습니다. 뒤에 비류들이 정읍(井邑)으로 전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9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 일본 병사와 함께 같은 때에 출발하여 정읍(井邑)의 앞 가게전점(前店)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이미 달아나 흩어졌기 때문에 더 전진하여 정읍현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습니다. 일본 병사는 천원참(川原站)에서 나누어 주둔하였습니다. 금구현 아래로 백리 되는 길에는 인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아주 끊어져서 보기에 참으로 참혹하였습니다. 태인읍에서 장위영(壯衛營)의 2대(隊)와 일본 병사들이 도착하여 승전한 소식을 처음에는 일본 진영의 지시 때문에 본진(本陣)에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 사실을 전주에 주둔한 장위영의 진영에 보고하였다고 하므로 (장위영에서 이쪽으로) 보고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다. 생포한 여러 놈들은 이미 일본군 진영에서 참작하여 방면하였다고 하므로 또한 심문하여 공초를 얻지 못했습니다. 비류들은 나주(羅州)에서 진을 치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 사람이 자기네 각 부대가 모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하루를 더 머물자고 요청하였으므로, 그대로 천원역(川原驛)에서 머물러 묵었다가 차차 전진할 계획입니다.
제(題): 초 2일에 무사히 장성(長城)에 도착하여 다행이기는 하지만, 나주(羅州)의 적들이 또한 도망갔다고 하니, 행군시의 일이 몹시 걱정이 된다. 이후 일의 형편에 대하여 계속 빨리 보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