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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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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영남토포사 지석영이 보고함

영남토포사(嶺南討捕使) 지석영(池錫永)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9월 26일에 대구에서 출발하여 통영(統營)에 이르러 포군 1백 명을 동원하여 통영의 장교 신철회(申徹會)와 정인식(鄭仁植)에게 이들을 거느리고 행군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읍들의 보고를 접해 보니, 비류(匪類)가 창궐하는 정도가 지역마다 모두 같아서 한편으로는 장교와 아전을 파견하여 정탐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병을 보내 비류를 추적하여 붙잡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곤양군(昆陽郡)에 있는 일본군사가 힘을 합쳐 협력하자고 부탁하였기 때문에 막 곤양으로 향하다가 진주(晋州)에 도착하여 동도(東徒)의 괴수 임석준(林碩俊)을 붙잡았습니다. 전후에 그가 벌인 흉악한 짓을 이미 자백했기 때문에 10월 초 8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쯤에 곤양의 북쪽 시장에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17명을 잡아서 심문하였더니, 이미 동학을 배반한 자들이거나 위협을 받아 강제로 따른 자들이어서 모두 엄히 타일러서 풀어주었습니다. 초 9일에는 밤에 (동도) 수백 명이 하동(河東)의 금오산(金鰲山)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군(本軍)과 일본군이 즉시 함께 출발하여 비도들과 접전을 벌여 8명을 총살하였고, 본군에서 21명을 생포했으며 일본군은 9명을 잡았습니다. 그밖에 총을 맞고 달아나다가 죽은 자는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군과 일본군은 한명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이) 빼앗은 물건은 나팔 1쌍, 총 3자루, 창 2자루, 대쟁(大錚) 1개, 북 1개, 도끼 1자루, 괭이[光耳] 1자루, 백미(白米) 5말이었고, 본군이 빼앗은 것은 소 1마리여서 요리사가 도살하여 병사들에게 먹였습니다. 12일에는 행군하여 진주 수곡면에 도착하였는데, 수천 명의 동도들이 무리를 모아 성을 함락시킬 우려가 아침저녁으로 있을 만큼 절박하였습니다. 따라서 본군이 남아서 진주를 지켰으며, 일본군사는 적들과 접전을 벌여 총살한 자들의 수가 186명이었고을 총살하였고, 생포한 자는 2명이었으며, 빼앗은 물건은 총 136자루, 창 54자루, 깃발 3개, 나팔 3쌍, 연환(鉛丸)과 화약 1포(包), 소 2마리, 말 17필, 환도 18자루였으며, 일본 군사 중에서 부상당한 자는 3명이었습니다. 같은 날 도착한 진주목사의 보고에 따르면, 3삼남도성찰(三南都省察)인 익산포(益山包)의 괴수(魁道) 김상규(金商奎)와 문쌀순(文㐘順), 박범이(朴凡伊) 등을 읍에서 잡아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김상규는 전후에 그가 벌인 흉악한 짓을 이미 자백했기 때문에 그날로 읍의 장시(場市)에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문쌀순은 김상규의 앞잡이[倀鬼]가 되어 그동안 저지른 흉악한 정황이 이미 드러났고 금오산에서 붙잡힌 최학원(崔學元)의 죄와 같은 형률에 관계되어 동시에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박범이는 잠시 사환(使喚)으로 있었으나 따로 흉악한 짓을 저지른 행적이 없기 때문에 일단 통제중영(統制中營)에 엄히 가두었습니다. 21일에는 일본군이 하동(河東)에서 동도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우병영(右兵營)의 포군 1백 명을 보내 함께 싸우도록 하였습니다. 22일에는 행군하여 갈록치(渴鹿峙)에 이르렀는데, 동도 수백 명이 일본군에 쫓겨 배를 타고 광양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흩어져서 산골짜기 사이로 달아났는데, 갑자기 맞부딪쳐 서로 육박전을 벌여 11명을 총살하고 17명을 생포하였으며 빼앗은 물건은 총 2자루, 창 2자루, 환도 2자루였습니다. (생포한 동도) 중에서 김달덕(金達德), 김성대(金性大), 김재희(金在僖) 등은 전후에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자백했기 때문에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일본 육군 대위의 편지를 받아보니, “하동의 싸움에서 제 1차로 총살한 자들이 3명이며, 생포한 자들은 2명이고, 부상을 입고 도주한 자는 그 수를 알 수가 없으며, 빼앗은 물건은 깃발 5개, 총 4자루, 창 2자루, 환도 1자루, 소 2마리, 말 2필이었으며, 제 2차로 총살한 자들은 7명이고 생포한 자들은 5명이며 빼앗은 물건은 갑옷과 투구 각 1건, 진우치(陣羽幟) 1개, 큰북 1개, 기(旗) 3개, 총 5자루, 나팔 1쌍, 인(印) 1개, 화약과 활 및 화살, 창 등이었다.”고 하였습니다. 23일에는 또 9명을 잡았는데, 모두 억지로 들어간 자들이어서 달리 흉악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엄히 타이르고 풀어주었습니다. 적진의 정황을 탐문하였더니 모두 순천으로 달아나고 없었습니다. 하동은 영남과 호남이 경계를 접하는 곳에 있어서 지키는 방도를 한시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병사(右兵使)에게 공문을 보내어 하동부에 포군을 주둔하게 하여 요새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24일에는 일본군이 창원(昌原) 쪽으로 가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돌아갔습니다. 토포사는 휘하에 통영(統營) 포군 1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날이 추운데 옷을 얇게 입어서 동상에 걸린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었기 때문에 회군하여 통영(統營)에 도착하였으며 포군을 돌려보냈습니다. 29일에는 배를 타거나 육지를 통해 가서 11월 초 3일에는 부산에 도착하여 일본 육군의 노고를 위로하였습니다. 초 7일에는 출발하였으며, 초 10일에는 대구로 복귀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비류를 뒤쫓아 생포하고 엄히 곤장을으로 징계하고 풀어주었는데, 그 숫자가 71명입니다.

제(題): 도착했다. 전후에 승리를 거두어 참으로 가상하고 기쁘다. 나머지 비도들을 숙청한 정황에 대해서는 계속 탐문하여 보고를 올려라.”

(번역 : 류호석 전북대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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