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일러두기

선봉이 보고함

선봉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금 도착한 장위영(壯衛營)의 대관 윤희영(尹喜永) 등의 보고 내용에, “지난달 26일에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의 명령으로이 지휘하여 대관 윤희영, 이규식(李圭植), 교장 오순영(吳順永), 장세복(張世福), 양기영(梁基英), 이경진(李景振), 홍선경(洪善敬) 등과 병사 230명, 일본 군사 40명이 완영(完營, 전라 감영)에서 출발하여 금구(金溝)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행군하여 태인(泰仁)에 도착하였더니, 동괴(東魁) 전봉준(全琫凖)과 김문행(金文行), 유공만(劉公萬), 문행민(文行敏) 등 4명네놈의 접주(接主)가 8천여 명을 거느리고 그곳 읍의 성황산(城隍山), 한가산(閑加山), 도리산(道理山)에 진을 치고 모여 있었습니다. 세 곳이라고는 하지만 봉우리가 아홉 개나 되었으며, 각기 진(陣)의 형세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적들은) 천보총(千步銃)을 계속 발사하였으며, 깃발을 휘두르고 나팔을 크게 불며 그 기세가 대단하였습니다. 적이 주둔한 곳은 모두 높은 산으로 지세가 험준한 곳이었으며, 우리 군사는 평야의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관 윤희영과 교장 이경진, 홍선경과 병사 90명이 일본 군사 20명과 함께 산의 서쪽에서 공격하였으며, 대관 이규식, 교장 오순영, 장세복, 양기영과 병사 140명 및 일본 군사 20명은 산의 동쪽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길을 나누어 양쪽에서 일제히 물밀 듯이 올라갔는데, 적의 탄환이 비 오듯이 끊이지 않고 아래로 날아왔습니다. 혹은 밭이랑에 기대어 총을 쏘기도 하고 혹은 들판에 엎드려 쏘기도 하면서 대열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호응하면서 앞을 향해 계속 진격하였습니다. 군사들이 함께 힘껏 함성을 지르며 산에 올라 신속하게 공격하자, 적도는 두려워하고 겁을 먹은 채 깃발을 흔들었으나 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은 채였습니다. 이어서 적이 주둔했던 산을 빼앗아 건너편 봉우리를 바라다보니, 앞과 뒤의 산에 있던 적들이 성황산에 모두 모여서 계속하여 회룡총을 발사하고 나팔을 크게 불고는 그대로 산을 내려와 군대를 모으고 다시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성황산으로 급박하게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총을 쏘았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 적은 방비를 할 수가 없게 되자 각자 달아났습니다. 따라서 (아군은) 길을 나누어 동서로 20리가 되는 지경까지 쫓아가서 각기 생포한 자들이 50여명이었으며, 총에 맞아 죽은 자들은 40여명이었습니다. 빼앗은 물건은 회룡총 15자루, 조총 2백여 자루, 화약과 탄환 및 창죽(槍竹)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구안마(具鞍馬)는안장을 갖춘 말은 6필이었습니다. 때는 이미 술시(戌時, 오후 7~9시)가 지날 무렵이어서 즉시 군사를 모아 점검해 보니 우리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 모두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히 경계를 서면서 읍에서 유숙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싸움에 승리한 소식은 지체해서는 안 되기에 베껴 써서 먼저 보고를 올리며, 책자는 담당 영관(領官)이 보고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정하여 올릴 계획입니다.

제(題): 이렇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 감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후 군대의 행진 상황에 대해서는 계속하여 빨리 보고하라.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