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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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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급히 보고함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 민종렬(閔種烈)이 급히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 달 24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쯤에 도착한 의정부의 관문에, “호남에서 비도들의 소요가 갈수록 더욱 창궐하고 있지만 그곳 목사가 줄곧 굳건히 지키면서 우뚝하게 버팀돌이 되고 있으니 듣기에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홍주목사(洪州牧使)의 예(例)에 따라 나주목사(羅州牧使) 민종렬을 호남초토사로 차하(差下)하여, 그로 하여금 호남 우도의 각 고을을 지휘하도록 하여 오로지 비도들을 토벌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임금에게 아뢰어 이를 윤허한다는 전교를 받았다. 전교의 내용대로 받들어 시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도가 멋대로 행패를 부려 나라의 근심이 되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성읍을 약탈하고 수령을 협박하며 관청의 장부를 불태우고 무기를 도적질하고 대관(隊官)이 순절하기에 이르러렀는데 기(旗)에 목을 걸어었으며 윤사(綸使)가 명을 받들려 하자게 하고 길에서 불태워 죽였습니다. 또한 풍배(豊拜, 왕조의 발상지)인 태조(太祖)의 고향 전주성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함락되어 조경전(肇慶殿)과 경기전(慶基殿) 등 양전(兩殿: 조경단전[肇慶壇殿]과 경기전[慶基殿])이 몽진(蒙塵)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분하여 천지간에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당시 관찰사였던 신과 초토사는 우러러 조정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좇아서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길을 열고자 하고 있으니 저들 완악하게 꿈틀거리는 부류들도 마땅히 회개하여야 하는 데도, 오히려 다시 쳐들어 와 소요를 일으키며 전보다 훨씬 더 백성들을 유린하고 방자하게 행동하면서 욕심을 채우고 정당한 조세를 마음대로 움켜쥐고,징수하고, 명리(命吏)를 욕보이고 죽여 그 죄악이 가득 찼습니다. 외람되게도 재주가 없는 몸으로 명을 받자옵고 지금 여러 고을에서 일어난 비도의 소요를 가서 토벌하려고 합니다. 생각하건대 이곳 금성(錦城) 땅은 요충지에 있어서 직임이 보장된 곳입니다.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4월 무안(務安)의 비류 5백 명이 본주(本州, 나주)의 서쪽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습니다. 이에 격분하여 즉시 아전과 군교(軍校)들을 이끌며 영장(營將)과 협력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비류를 습격하여 30여명을 붙잡았습니다. 그 중에서 거괴 이여춘(李汝春)과 채중빈(蔡仲斌), 나순후(羅順厚)는 진영(鎭營)으로 압송하고 효수를 하여 사람을 경계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안계현(安啓玄) 등 27놈은 읍에서 처결하였습니다. 16일에 거괴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化中) 등은 여러 놈은 고부(古阜)에서 나와 함평(咸平)에 진을 치고 있다가 장차 본주로 오려고 하였지만 우리가 준비가 된 것을 보고는 감히 경계를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6월 17일에 그들 수천 명의 무리가 남평(南平)을 무너뜨려 점거하고 기필코 우리를 침범할 형세가 나타났지만 우리들이 이미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과연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7월 초 5일에 비괴 최경선(崔敬善)이 또 만여 명을 이끌고 불을 지르고 총을 쏘며 곧바로 서문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목사(牧使)와 우영장(右營將)이 직접 포(砲)와 돌을 무릅쓰고 군민(軍民)을 격려했으며 먼저 대포를 쏘고 계속하여 총을 쏘고 돌을 던져 저 비도들 중에서 넘어져 죽은 자들이 모두합하면 1백 명은 되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도망가 흩어졌습니다. 또 10월에 손화중이 만여 명이나 되는 많은 수를 이끌고 광주를 빼앗아 점거하고 본주[羅州]의 동북쪽으로 침략해 왔습니다. 따라서 퇴교(退校) 김창균(金蒼均), 호장 정태완(鄭台完), 전 첨사(僉使) 김성진(金聲振), 이방 손상문(孫商文), 난후장(攔後將) 전학권(錢鶴權), 하리(下吏) 박시홍(朴時泓), 이돈기(李敦祺) 등으로 하여금 포사(砲士) 3백 명을 거느리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저 비도들은 아군의 수가 적은 것을 업신여겨 먼저 침범하여 접전을 벌이다가 대포에대포를 쏘자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며, 조총과 화악과 탄환 등을 빼앗았습니다. 뒤이어 수천여 명의 비도들이 사창(社倉)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일시에 쫓아가 죽였으며, 한꺼번에 대포를 쏘아 탄환에 맞아 죽은 자들이 23명이었습니다. 11월 11일에 비괴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圭)가 수천 명의 적당을 불러 모아 읍교(邑校) 손병선(孫炳先)을 붙잡아가서는 총살한 뒤에 시신을 불에 태우고는 무리를 주(州)의 북쪽 창고로 옮겼다고 하니 원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급히 호방(戶房) 김재환(金在煥) 등에게 명령하여 포군을 나누어 이끌도록 하였으며, 좌수 박상수(朴祥壽), 천총(千摠) 최성순(崔聖純), 하리(下吏) 박근욱(朴根郁), 최윤룡(崔允龍), 구유술(具有述), 김학술(金學述), 양인환(梁仁煥), 최문섭(崔文燮) 등은 각각 포군을 이끌고, 우영장(右營將)이 직접 수진군(守鎭軍) 150명을 직접 거느리고 힘을 합하여 함께 토벌에 나서자 한꺼번에 충돌하면서 전투를 벌여어지러히 포를 쏘고 서로 살해하여 총에 맞아 죽은 자가 21명이 되었습니다. 포수 강춘삼(姜春三)과 대장(隊長) 전공서(錢公瑞), 김기옥(金基玉) 등이 산으로 올라가 쏜살같이 쫓아가자 저들이 모두 새처럼 놀라 영광(靈光)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또한 무안(務安)의 접주 배상옥(裵相玉)이 만여 명의 무리를 불러 모아 그곳 현에 불을 지르고 마음대로 무기를 빼앗고는 본주(本州)로 향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16일에 행군하여 정탐하였는데, 적의 세력이 마치 숲과 같아서 우리는 적고 저들 무리는 많았습니다. 총을 잘 쏘는 포군 백여 명을 장등(長嶝)에 매복하였시켰으며, 그밖에 의거(義擧)하며 나온 민병 1,500명이 응접하여 지원하였습니다. 17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쯤에 적들은 아군의 수가 적은 것을 엿보고 대포를 쏘며 불을 지르고 곧장 이후(二帿)로 들어왔습니다. 포수 강춘삼(姜春三)이 먼저 쏜 대포 한 발의 소리에 세 갈래 길의 복병이 일시에 돌격하자 저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총을 맞고 죽은 자는 65명이었습니다. 서로 짓밟히며 물에 떨어져 죽은 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아군은 이어서 진을 치고 있다가 밤에 백여 명의 포군을 보내 마구 포를 쏘며 적을 습격하여 21명의 적을 죽였습니다. 이에 적의 간담은 서늘해지고 아군의 사기는 더욱 떨쳐 일어났지만 뜻밖에도 북쪽에서 위급한 소식이 들려와서 명령을 내려 회군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북쪽의 위급한 소식은 이른바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圭)가 비류 만여 명을 불러 모아 곧장 읍 부근의 이로면(伊老面)으로 쳐들어와 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면서 평민 10여명을 쏘아 죽이고 시골집 열수십 곳을 불태운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불태웠습니다. 그러나 본읍은 단단히 지키면서 그들이 방심할의 느슨한 틈을 엿보다가 24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쯤에 또 포군 3백 명을 보내 세 갈래의 기병(奇兵)으로 나누어 먼저 오권선을 공격하고 또 포군 50명과 민병 7백여 명을 보내 응접하게 하였으며, 미시(未時, 오후 1~3시) 쯤에 갑자기 쳐들어가 (적의) 주위를 포위하고 불시에 포를 쏘아 적들 가운데 총을 맞고 죽은즉사한 자가 353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대체로 적당이 비록 그 수가 많았지만 모두 오합지졸인 반면로 관군은이 한 번 나아가면 문득 (적들이) 모두 짐승처럼 달아났으니 이는습니다. 때문에 여러 번 전투를 하며 필승을 다짐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에서 반드시 승리한 것입니다. 빼앗은 무기는 대포 3좌, 말 16필, 조총 30자루입니다. 이처럼 고립무원의 성을 8개월 동안 굳건히 지켰으며, 남은 군사들이 적과 마주 싸우면서 2개월 동안 네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고, 또한 한 명의 군사도 꺾이지 않고 하나의 병기도 버리지 않으며손상되지 않았으며 위험한 수양성(睢陽城)을 스스로 보호하였고 즉묵성(卽墨城)을 홀로 보전하였으니, 이는 또한 요행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임금의 덕화(王靈)에 힘입어 이처럼 방어를 할 수 있었고, 또 인재를 얻어 싸움을 하거나 멈출 수 있었으며, 또한 군사력에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출전한 장령(將領)과 빼앗은 무기들은 책으로 엮어 올려 보냅니다. 그리고 별군관 김윤창(金潤昌)과 군관 송덕순(宋悳純)은 적시에때 맞추어 내려와 24일에 적을 토벌할 때 그들 덕분에 실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비류를 토벌할 때에도 잠시도 늦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본 읍이 각 읍의 접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각처의 비류들이 무시로 모이고 흩어지니 지금 성을 지키는 대책이 없는 일이 걱정이 됩니다. (신은) 임무를 맡은 이래 근심하고 송구스럽고 절박한 마음이었습니다. 일의 형편을 헤아리셔서 특별히 정병(精兵) 수천 명을 본진(本陣)에 소속시켜 기필코 비도를 소탕하여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제(題): 도착했다. 포상의 은전은 정부의 처분을 기다려라.

주석
대관(隊官)이 순절 장위영 대관인 이학승(李學承)이 장성 전투에서 농민군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말한다.
윤사(綸使)가 명을 받들려 하자게 하고 길에서 불태워 죽였습니다. 고종의 윤음을 받들고 원평에서 전봉분을 만나 봉독한 배은환(裵垠煥), 이효응(李斅應) 두 사람을 죽인 사실을 말함.
조경전(肇慶殿)과 경기전(慶基殿) 등 양전(兩殿: 조경단전[肇慶壇殿]과 경기전[慶基殿])이 몽진(蒙塵) 이곳에 봉안한 이성계의 영정을 전라감영 판관 민영승이 옮겨 놓은 일을 말함.
명리(命吏)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
무안(務安)의 비류 무안 대접주 배상옥은 나주를 공략하려 몇 차례 공격했다.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圭) 나주 출신으로 나주 집강소를 차리고 광주에서 활동한 손화중, 최경선과 연대해 나주 관아 점령을 위해 전투를 여러 차례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기병(奇兵) 적이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한 전술로 기습하는 부대를 말한다.
수양성(睢陽城)을 스스로 보호 睢陽之自保. 당(唐)나라 때의 장순(張巡)이 안녹산(安祿山)과의 싸움에서 수양성(睢陽城)에 웅거한 고사에서 연유하여, 수양지위(睢陽之危)는 위태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위태로운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대처하였다는 뜻이다.
즉묵성(卽墨城) 춘추전국시대에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쳐서 점령할 때에 72성 중에 전단(田單)이 지키는 즉묵성(卽墨城)만이 보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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