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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군정실기 甲午軍政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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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감사 박제순이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베껴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전에 도착한 의정부의 관문 내에, “지금 충청감사 박제순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태안(泰安)의 전 부사(府使) 신백희(申百熙), 서산(瑞山)의 전 군수(郡守) 박정기(朴錠基), 종친부(宗親府)에서 파견한 파원 김경제(金慶濟) 등에 대하여 백성을 구휼한 일을 포상하는 특전을 묘당(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세상이 어지러운 가운데 갑자기 목숨을 잃었으니 매우 참혹하고 측은하지만 죽은 사유가 아직 명백하지 않다. 관찰사에게 상세하게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게 한 뒤에 임금에게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고,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여 올 때 연로(沿路)에서 담군(擔軍, 짐꾼)들을 지정해 공급하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호상(護喪)하도록,할 뜻으로 두 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이)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전교에, ‘뜻을 잘 받들어 살펴서 시행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안의 전 부사 신백희와 종친부에서 파견한 파원 김경제가 죽은 근본원인을 해당 관아의 수이향(首吏鄕)에게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글을 지어 태안(泰安) 겸임 홍주 영장(洪州營將)에게 관문(關文)으로 지시를 하였는데, 지금 그곳 진(鎭)의 영장(營將) 홍건(洪楗)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태안 관아의부의 좌수(座首) 명광삼(明光三)과 이방(吏房) 김주하(金柱河)를 바로 잡아들여 상세하게 심문하였는데, 그 보고에고하기를, ‘9월 26일에 종친부에서 파견한 관원이 본 관아부에 와서 귀화하도록 잘 타이르겠다는 뜻을 각 면(面)에 널리 알렸습니다. 그 달 그믐날에 수백 명의 비류(匪類)가 모여 선(善)으로 나아가착하게 살겠다며 귀화한다는 뜻으로 일제히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0월 초 1일에 이른바 접주(接主)라고 하는 5명을 잡아들여 타이르고 바로 풀어주었더니 초 2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 저들 무리 1만 여명이 각자 총과 창을 가지고 관아에부 안으로 돌입하였습니다. 방어사(防禦使)와 (종친부의) 파견원이 하리(下吏) 김원섭(金元燮)의 집으로 잠시 피신하였는데, 저들이 바로 동헌(東軒)에 올라와서는 (이내) 관사(官舍)와 각 건물에 불을 지르고 방어사와 종친부의 파견원을 구석구석 찾다가 마침내 붙잡혀서 창으로 마구 찌르고 끝내 칼로 흉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방과 좌수는 한꺼번에 잡혀 여러 차례나 묶여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서산군수(瑞山郡守)는 지금 이미 부임하였기 때문에 전 군수(前 郡守) 박정기(朴錠基)가 죽은 근본사유를 상세히 보고하도록 역시 관문으로 지시하였더니, 지금 받은 해당 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 내용에, “전임 군수 박정기가 부임한 지 겨우 1달 만에 교화를 널리 펴서 경내에 동도가 거의 귀화하였습니다. 뜻밖에 10월 초 1일에 수천 명의 비류가 함성을 지르고 사방에서 모여들자 군(郡)의 아전이 위급함을 보고해서 피할 것을 청했으나 전임 군수는 태연한 안색으로 말하기를, ‘어려움에 직면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고 칼 1자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방(吏房)유리(由吏) 송병훈(宋秉勳)이 곁에서 호위를 하다가 적에게 먼저 죽고 전임 군수는 혼자 문루에 기대어 칼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죽은 흉도가 몇 명이나 되었고 부상을 입은 자는 셀 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가려고 했으나 아! 저 좌수(座首) 유선일(柳善一)과 사령(使令) 이삼달(李三達), 정차복(鄭次卜), 관노(官奴) 금돌(今金乭)이란라는 이름을 가진 놈이 함께 모의하고 안에서 호응하여 수없이 곤장을 때렸습니다. 연달아 총을 쏘아 1발에 죽지 않자 2발을 쏘았으나 2발에도 죽지 않자 3발, 4발을 쏘아도 죽지 않고 낯빛이 변하지 않고으며 입에서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다음날에 흉도가 입을 억지로 열어 총을 쏘아서야 비로소 죽었습니다. 다시 (시신을) 염(斂)할 때까지 40일이나 오래되었지만 안색과 기품 있는 모습이 늠름하여 적을 꾸짖는 때와 같았습니다. 그 바른 충성과 탁월한 절개는 옛사람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또한 이방이유리가 호위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일도 매우 가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해당 군(郡)의 유생들이 연명(聯名)으로 올린 소장의 뜻이 대략 같다고 합니다. 이에 급히 아룁니다.

제(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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