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봉(左先鋒)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초 6일부터 초 8일까지 장성(長城)에 주둔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숙박하였습니다. 지금 도착한 벽사찰방(碧沙察訪)의 보고 내용에, “동도 1천여 명이 장흥(長興)에 모였다가 이 달 초 4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 곧바로 본 역(本驛)의 관아와 민가 여염집에 들어가 모두 불을 지르고 우관(郵官)의 힘 따위로는 막을 대책이 없어, (찰방이) 병영으로 말을 달려가 대면하여 (동도를) 토벌할 수 있는 방법을 사유를 갖추어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병사(兵使) 사또가 분부한 내용에, ‘비류가 병영 아래 근처까지 닥쳤는데 방어하는 군사를 진영에서 풀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지금 이러한 형편을 초토영(招討營)에 가서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래서 (초토영에서 가니) 분부하는 내용에, ‘나주의 군대를 동원할 계획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에 있는 4백여 호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처분을 내려주셔서 경군(京軍) 수백 명을 동원하여 즉시 토벌하도록 하여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로 하여금 예전처럼 안도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연이어 도착한 전라병사(兵使)의 공문 내용에, “이 달 초 5일에 비류 1만여 명이 장흥에 모여 부사(府使)를 잡아 심하게 때려 머리가 다쳤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알 수 없으며, 공형(公兄)을 총살하고 남녀를 살해하여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또 좌측 연안에서 정탐을 한 자들에게 들으니 ‘각처의 비류 수만 명이 장흥을 함락한시킨 무리들과 합세하여 곧바로 본 병영을 도륙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방어와 수비를 비록 엄히 단속한다고는 하지만 병사들이 모두 민간의 장정인데다가 중과부적임을 생각하면 성을 잃어버릴 재난이 눈앞에 닥쳐있습니다. 속히 구원하는 방책을 꾀하여 병영이(성이) 유린당하는 재난을 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영과 역에서 알리는 경계의 보고가 이처럼 급박하기 때문에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나주를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여산에서 군대를 위로하기먹이기 위하여 사용한 음식은 책자로 만들어 올립니다.
제(題): 도착했다. 병영에서 지원하러 간 이후의 상황을 계속 급히 보고하라.
(번역 : 류호석 전북대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