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부사 이두황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난 달 30일에 일본 사관(仕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와 함께 전주(全州)에서 만마관(萬馬關)으로 출발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당일로 만마관에 도착하였고, 12월 초 1일에는 임실(任實)에 도착하였으며, 초 3일에는 남원(南原)에 도착하여 성에 들어갔는데, 이미 약탈을 당하여 빈 집이 절반이 넘었고, 동문과 서문, 남문 등 3문이 모두 불에 탔으며, 집집마다 모두 잿더미가 되어 황량한 읍의 모습은 서리를 맞은 풀과 거의 같았습니다. 놀라고 겁을 먹은 아전과 백성은 활에 상처를 입은 참새와 같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그 정상(情狀)이 매우 불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루를 머무르며 위로하고 구제하면서 안정을 시키고 나주를 구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초 5일에 순창(淳昌)에 도착하였고, 초 6일은 바로 일본의 설날이어서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또한 광양, 순천, 낙안 등지에서 적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 사관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지시로 군대를 나누어 본진(本陣)은 곡성, 구례, 광양, 순천, 낙안, 보성 등지를 따라 (비도를) 토벌한 뒤에 나주에서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일본군 진영은 담양에서 바로 나주로 가기로 약속을 하여, 모두 초 7일에 출발하였습니다. 순창에서 들어서 알게 된 소식은, 적괴(賊魁) 전봉준(全琫準)과 양하일(梁河一), 최경선(崔慶善)이 주민에게 잡혀서 소모관 임두학(林斗鶴)에게 바쳐졌다가 일본군 진영에 옮겨서 가두었다는 보고였습니다. 거괴가 잡혔으니 이로써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음을 알 수가 있고, 백성들이 힘써 노력하였으니 그들이 교화를 받아 모두 귀의(歸依)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기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題): 듣기에 장흥(長興)이 방어를 하지 못하여 그 동안에 성을 되찾았는지 아직 알지 못하겠다. 행군(行軍)의 형편을 계속 급히 보고하고, 나주는 이미 경계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