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경리청(經理廳) 참령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가 보고하는 일입니다. 금영(錦營)의 지휘에 따라 대관 김명환(金命煥)과 참모관 이윤철(李潤徹), 교장 정재원(鄭在元)이 병사 70명을 거느리고 이 달 초 8일에 보은과 청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김명환의 보고 내용에, “초 10일에 옥천에 머무르면서 비류가 영동 용산 장터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11일에 행군하여 청주의 병사 180명과 청산(靑山)에서 만나 진영을 합하였습니다. 12일에 영동으로 가서 수만 명의 적도와 서로 맞서 싸웠는데 비류 5, 60명을 쏘아 죽인 뒤에 그 기세를 타서 적을 추격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졌기 때문에 후퇴하여 산으로 올라가 방어하였습니다. 그러자 적의 형세가 더욱 강성하여져서 사면에서 (아군을) 포위하였는데 형편이 매우 급박했습니다. 참모관 이윤철과 본영의 우 2소대 병사 김창운(金昌云)과 청주의 병사 1명이 총을 맞고 죽었으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우 1소대 병사 이기준(李基俊)과 김억석(金億石), 주태산(朱太山) 3명이 낙오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으나 뒤에지만 곧바로 청산으로 회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도 적의 소굴이어서 서로 대적하여 총을 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주둔하여 머물 수가 없어서 다시 보은으로 향하였는데, 저 무리들이 우리 군대의 세력이 외롭고가 떨어져 있고 약한 것을 엿보고서 사면에서 서로 추격하였기 때문에 13일에 청주의 병영으로 회군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들으니 참모와 김창운 및 향병이 전사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고 비참한 일이다. 시신을 운구하고 매장하는 절차는 지금 순영과 병영에 관문으로 지시하였다. 낙오한 3명은 각별히 종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청산읍은 평소 적의 소굴이라고 이르는 곳인데, 또 이렇게 포를 쏘며 관군에 저항을 하였으니 다른 지역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들을 토벌하고 잡는 절차에 대해서는 출진하는 대관에게 각별히 지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