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현감(堤川縣監) 오진영(吳振泳)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본 현의 창의유생(倡義儒生) 서상무(徐相懋) 등이 올린 보고 내용에, “11월 24일 유생 등 120인이 창의하고 출발하여 곧장 청풍(淸風)의 적괴 성운환(成雲煥)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학현(鶴峴)으로 갔는데, 이곳은 청풍 제일의 요충지로청풍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네 개의 산이 벽처럼 서 있어서 겨우 한 길로만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밤에 출발한 두 부대가 한결같이 산 뒤의 석벽을 따라 가다가 동네 어귀에 들어 왔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20여 리를 더 가니 인가가 40여 호 있었고 순찰하면서 방어하는 자들이 수십여 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아군이 몰래 주위를 포위하고 있을 때 적진에서 포를 쏘며 응전하는 자가 1백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아군도 포를 쏘며 응전하자 적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총에 맞아 죽은 자가 13명이었습니다. 성운환은 도망갔으나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은 뒤에 적의 무기를 거두었는데, 총 23자루, 창 19자루, 환도 7자루였습니다. 이어서 회군하여 충주 적곡(赤谷)의 적괴 성두환(成斗煥)이 있는 곳으로 곧장 나아가서 병사를 나누어 거주지를 포위하여 그 애비 성종연(成鍾淵)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이른바 대선생(大先生) 최북술(崔北[‘福’의 오기]述; 최제우를 말함)의 도제(徒弟)사촌동생으로, 보은의 적 최시형(崔時亨)과 단양의 적 강차주(姜次周), 전중삼(田仲三), 김봉암(金鳳巖) 등 5명다섯 놈이 똑같이 사악한 술수를 전한 자들입니다. 성두환의 육촌형제가 역적질을 했는데 사실은 이놈이 지휘를 한 것입니다. 무기를 수색하여 아군의 용도로 삼았으며, 포군 5명과 창군(槍軍) 5명을 시켜 종연과 가속을 제천으로 압송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적의 실정을 다시 정탐해 보니, 적괴 성일환(成日煥)이 청풍의 생춘전(生春田)에서 기포(起包)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곳으로 가서 토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조정의 처분을 얻지 못한 채로 감히 먼저 의병을의거를 일으켰으니 참으로 황송한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 현에서 거사하여 사로잡은 흉도들은 마땅히 즉각 압송하여 속히 대벽(大辟, 사형)을 시행하도록 하고, 역적 성종연이 진술한 구초(口招)는 그가 공초를 쓰도록 하였으며, 역적의 아들 성두환은 직접 관아에 출두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선 며칠을 기다린 끝에 몇몇 일개 유생서생(書生)들이 적개심을 품고 나랏일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많은 적들을 베고, 거괴를 사로잡았으니 상을 주어 장려하는 의리로 보아 전례대로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제(題): 듣기에 참으로 가상한 일이지만 아직도 거괴를 붙잡지 못했으니 그 공로를 기다렸다가 조정에 포상을 내려달라고 아뢰겠다.
창의(倡義) 유학(幼學) 서상무 등 194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