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관 육상필(陸相弼)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난 11월 초 10일에 본 읍의 선비 김재빈(金在斌) 등과 함께 박정빈(朴正彬)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모인 의병을 수습하니 4, 5백 명이 되었습니다. 20일에 마침 청산(靑山)의 비도 수백 명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달려가 4명을 칼로 베고, 접주 최태운(崔泰雲)을 사로잡았습니다. 28일에 보은에 도착하여 윤봉길(尹奉吉), 신재기(辛在基), 신성렬(申性烈)과 최법헌(崔法軒, 최시형)의 딸, 임규호(任奎鎬)의 처 등을 병영으로 압송하였습니다. 12월 12일에 거괴 최시영(崔時榮), 임규호, 황하일(黃河一), 박원칠(朴元七), 이국빈(李局賓), 박석규(朴碩圭) 등이 영동에 모여 있었는데, 그 수가 6, 7만 명이 되었기 때문에 박정빈과 청주의 군사 2백 명, 경병(京兵) 70명과 함께 그곳 지역으로 달려가서 우선 적진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적진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있고, 관군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산에 있는 적들은 개미처럼 포탄을 사방에다 아래로 퍼부어 관군이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박정빈이 의병들에게 지시하여 서북쪽의 모퉁이로 군사를 벌여서펼쳐서 진을 쳐서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고 자신은 전면에 나서서 교대로 적들에게 총을 쏘게 하였더니 적들 가운데 죽은 자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한 쪽 길이 열려서 풀리면 관군이 한 번에 에워싸서 서로 종일토록 전투를 벌여 화약과 탄환이 모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립된 병사들을 가지고 끝까지 쫓아갈 수도 없어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퇴군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참모 1인, 관군 2인, 의병 1인이 총에 맞아 죽었고, 부상자는 7, 8인이 되었습니다. 적들 가운데 죽은 자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청산에 돌아오자 읍리들과 동도가 또 봉기하였기 때문에 관군과 의병이 분격하여 길을 트고 방향을 바꾸어 보은으로 갔습니다. 밤새 달려가는 바람에 사람도 말도 지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그곳 고을의 수령과 관군이 함께 청주로 향하였습니다.
제(題): 도착했다. 이후 일의 형편을 계속 속히 보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