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일본군 사관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지시로 인하여 본진(本陣)은 이 달 초 7일에 순창에서 출발하여 구례와 곡성으로 향한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순창에 있을 때에 구례현 공형(公兄)의 보고 내용에, “본 현의 민인(民人)들이 유생 이기(李沂)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아 적을 토벌하여 지키려고 계획했으나 순천과 광양 등의 적도들이 항상 침범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을 비우고 종군(從軍)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민병(民兵)을 둔 원래의 의도로 볼 때 본래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며, 백성으로 하여금 성을 방어하는 데에 뜻을 두게 하면서 관군을 기다리라고는 뜻으로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일본군 사관이 이 보고를 보고 본진으로 하여금 그곳 현(縣)으로 가게 하여 초 8일에 곡성에 도착하였고 초 9일에는 구례현에 도착하였는데, 이기(李沂)가 민병(民兵)을 이끌고 힘껏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생업이 안정되었고 성(城)이 공고하였습니다. 이기는 멀리 떨어진 곳의 서생(書生)으로 향촌 전체의 추대를 받아 의병려의 깃발을 들어 안으로는 (성을) 지키고 밖으로는 적을 막았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추대하여 온 경내가 그에 의지하여 안정되었습니다. 그의 성의(盛儀)를 참고하건대 매우 가상합니다. 특별히 (그에게) 관직을 허락하여 사람들을 이끌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기가) 각 처에 보낸 격문(檄文)을 베껴서 올립니다. 본진은 하루를 더 머물렀다가 파병(派兵)한 군사가 모이는 것을 기다려서 11일에 광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제(題): 적과 싸우려는 의기를 더욱 다지고 큰 공훈[膚功]을 연이어 아뢰도록 하라. 그러면 마땅히 임금님께 아뢰어 표창할 길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