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사 박제순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금 황간현감(黃澗縣監) 송창로(宋昌老)의 보고 내용에, “이 달 초 10일에 적당이 영동(永同)으로 갔기 때문에 아전과 군교를 시켜 가서 정탐하게 하였더니 20여명의 병사들이 상주에서 와서 본 현 수석리(水石里)에서 적과 서로 접전을 벌였지만 관군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적도는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인명을 살해하였습니다. 12일에 병영의 병사들이 청산(靑山)에서 와서 적과 서로 접전을 벌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고 각자 퇴진(退陣)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도착한 보은군수 이규백(李奎白)의 보고 내용에, “이 달 16일에 비도가 청산에서 본군으로 침범하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상주의 부대에 공문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병영에 달려가서 위급한 상황을 보고하였습니다. 비류들은 이미 17일에 종곡으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군사를 보내 총을 쏘아 10여명을 죽였으며, 상주의 군사 3백여 명과 일본군사 50명이 같은 날 도착하여 밤이 새도록 접전을 벌였습니다. 18일에 병영의 병사들과 합세하여 협공하자 저들 비류로서 죽은 자들의 수는 알 수 없을 만큼 많았정도였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속리산으로 달아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접수한 병사 이장회의 보고 내용에, “이달 19일 순무영 별군관 이태래의 보고 내용에, ‘이 달 17일에 청영(淸營)의 영관 이용정 등을 이끌고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먼저 보은에 도착하여 곧바로 수백 명의 적도를 공격하여 24명을 총을 쏘아 죽였고, 나머지 무리는 종곡으로 달아났습니다. 18일에 종곡으로 쫓아갔더니 상주의 병사와 일본 군사가 먼저 도착하여 접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연이어 대포를 쏘면서 좌우에서 협공하자 적도는 저항하지를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수십 리를 쫓아가 총을 쏘아 죽이고 생포한 자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었고, 적도는 스스로 서로 밟혀서 죽은 시체들이 들에 가득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남악리에 머물러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거괴는 모두 속리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다음날 용화와 속리 등지로 가려고 하였습니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크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참으로 통쾌하합니다. 이후 일의 형편을 계속 급히 보고하라는 뜻으로 회답하여 지시하였습니다.
제(題):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