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 홍남주의 장계. 이 달 23일에 도착한 거제부사 임창호(任昶鎬)의 첩정 내용에, “지난 4월에 도착한 순영(巡營)의 감결(甘結) 내용에, ‘4월부터 8월까지 일본군함 대도오시마호(大島號)가 거제 연안을 왕래하면서 위험을 피할 안전한 곳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고, 험한 곳에 표(標)를 세워 하얗게 칠을 해놓았으니 훼손해서는 절대 안 되며, 모두 약장(約章)에 의거하여 시행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달 18일에 일본군함 1척이 병선항(兵船港)의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작은 선박을 여러 척 내려놓고 혹은 돌 표면에 흰색을 칠하거나 혹은 언덕에 깃발을 세웠는데 10리까지 길게 이어졌습니다. 선주인 구로오카 다데와끼(黑岡帶刀)와 우리말을 잘 해석독하는 사람과 함께 근처의 지경을 둘러보고 여러 섬에서 수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했다고 하며, 일본군함 함장은 쓰쿠바(筑波)를 배 이름으로 삼았으며 군인은 380명이라고 했는데, 육지에 내려와서 항구 소재의 어변정(禦邊亭)을 유람하다가 그 공간을비어있는 틈을 보고 수리를 하여 들어가 오래 살거처할 요량을 하였다고이라고 합니다. 같은 날 미시(未時, 오후 1~3시) 쯤에 동 선척이 신의 병영이 있는 항구에 정박하여 (아군이) 미처 탐문하기도 전에 본 함장이자 해군대좌인 구로오카 다데와끼(黑岡帶刀)가 하선하여 와서 통지하여 면담을 요청했으므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대접하였더니, 동도(東徒)의 종적을 순찰하고 산천 형승을 유람하기 위하여 거제선항(巨濟船港)에 정박하였으며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려고 한다고 하였으며, 잠시 문답을 나누다가 즉시 배로 돌아갔습니다. 같은 날 도착한 전라좌수사 김철규의 보고 내용에, ‘이 달 20일에 수천 명의 동도가 본영(本營)에 난입하고 인가에 불을 지르고 성을 침범할 염려가 있으나 토박이 병사들로 적을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병(精兵)정에한 병사 5백 명을 빠른 시일 내에 나누어 주면 토벌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지체 없이 즉시 병사를 파견하여 구원하여야 마땅합니다. 저들 무리가 호남에서 영남을 침범하는 일이 이미 잦아서 각읍의 첩보에 따르면 아군이 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가장 긴급하게 예방하여야 할 곳은 하동(河東) 입구입니다. 따라서 본영의 군사 1백 명을 이제 막 파견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힘을 합쳐 하동에서 방어하십시오. 좌수영이 요청한 5백 명의 군사는 지원하려고 하였지만 이를 실시하지 못해 한탄스럽습니다. 지금 구로오카 다데와끼(黑岡帶刀)의 병함이 신의 병영에 정박하고 있으니 참으로 적절한 기회입니다. 일본군사가 토벌을 지원하는 일은 일찍이 외무아문이 전보로 명령한 바가 있으므로 신의 병영의 우후(虞候) 이한상(李漢相), 군관 정두원(鄭斗轅) 등을 보내어 전라좌수영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진술하여 여러 가지로 직접 설득하고 문서를 발급하여 조회하였으며, 같은 달 24일에 신의 병영의 장교 최익정(崔益鼎)을 딸려 해당 거제병영으로 출발하게 하였습니다. 위 군함이 가서 구원하고 돌아오는 여정이 정확히 며칠이 걸릴지 알지는 못하지만 형편으로 보아 거제항으로 가서 정박할 것은 분명했습니다. 거제부사 임창호의 보고 내용에 빈 정자를 고쳐서 오래도록 있으려고머물고자 한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고, 또는 위험을 피할 안전한 곳을 찾는다는 뜻을 비쳤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의 동정은 계속 조사하여 급히 보고하겠으니 특별히 더욱 신칙하여 주시고 그 연유를 급히 아룁니다.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