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晉州) 등지에 출몰하는 난류(亂類, 동학군)들을 추적해서 체포한 상황과 일병(日兵)을 접응(接應)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 보고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추후에 등문(登聞)하기로 하고 그 연유를 헤아려 막 치계하였습니다. 연이어 도착한 곤양 군수(昆陽郡守) 송휘로(宋徽老)의 첩정(牒呈)에,
“10월 16일에 본영(本營)에 머무르던 일병 170여 인이 진주 백곡리(栢谷里)를 향하여 출발하였고, 18일에 일병 등이 동주(同州, 진주) 요천리(夭川里)에서 하동부(河東府)로 향해 가다가 광양(光陽) 등지에 떼 지어 있는 동도(東徒, 동학교도)들과 접전(接戰)을 벌였는데 동도의 무리 중에 총탄에 맞아 죽은 자들의 수효를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21일에 토포사(討捕使)가 포군(砲軍) 104명과 영관(領官) 2인, 순사(巡査) 1인, 수종(隨從) 9명을 거느리고 진주에서 곤양군(昆陽郡)으로 들어와 유숙(留宿)한 뒤 22일에 하동부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24일에 토포사가 거느리는 포군 104명, 영교(營校) 2인, 수종 15명 및 동래(東萊) 감리서(監理署)의 서기관(書記官) 2인, 순사 1인, 수종 15 명과 일병 200여 인이 하동부로부터 곤양군에 들어와 머무르다가 26일에 사천현(泗川縣)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우병사(右兵使) 이항의(李恒儀)의 첩정에,
“동도를 토벌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신 대로 한층 더 추격하여 체포하였으며, 본주 차평산(此坪山) 위에서 궤멸하여 흩어진 여당(餘黨)을 철저히 정탐하였더니 지난날 창(槍)을 싸매고 달아난 자들이 혹은 길에서 쓰러져 죽기도 하고 혹은 집으로 돌아가서 죽기도 한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 나머지 지치지 않은 놈들이 동남쪽으로 달아나려고 하면 험지(險地)를 점거하여 진을 치고 있는 본영의 포군과 일병이 있었고, 북쪽으로 달아나려고 하면 요로(要路)를 나누어 지키고 있는 단성(丹城)・산청(山淸)・함양(咸陽)・거창(居昌)・안의(安義)의 군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서쪽의 하동(河東)으로 달아나 광양(光陽)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하동부가 난리를 겪은 뒤로 군대의 체제가 아직 갖춰지지 못해 그물망을 빠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0월 20일에 본영의 포군 100명을 군교(軍校) 박두각(朴枓珏)에게 거느리게 하여 해부(該府, 하동부)로 보냈더니, 뒤쫓아 도착한 박두각이 급히 올린 보고에 ‘22일 새벽에 하동부에 도착하였더니 일병은 이미 모두 광양으로 건너갔고 하동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6인에 불과하였는데, 동도 1천여 명이 때마침 동남쪽에서 부중(府中, 하동부 안)을 에워쌌습니다. 그래서 본영의 포군이 관아 뒤쪽의 두 곳에 나누어 진을 치고서 첫 번째 고포(鼓砲)에 저들의 무리 중에 기(旗)를 쥐고 있던 두 놈이 죽었고 두 번째 고포에 일곱 놈이 죽었고 세 번째 고포에 일병이 기세를 거들어 충돌하니 동도들이 한꺼번에 도망하여 흩어지므로 추격하여 아홉 놈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일 신시(申時, 15~17시)에 토포사(討捕使)가 부(府)로 들어와 막 참작하여 처리하였기에 사유를 갖추어 치보(馳報)합니다.’ 하였습니다.”
라고 하고, 하동 부사(河東府使) 홍택후(洪澤厚)의 첩정에,
“10월 18일에 일병 140인이 하동부에 들어와서 다음 날 아침에 곤양군(昆陽郡)을 향하여 출발할 무렵, 광양의 구등산(龜嶝山) 위에 모여 있는 동도를 바라보고는 그대로 본읍(本邑)의 팔조면(八助面) 목도촌(牧島村)으로 향하여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가서 죽인 자들이 7, 8명이고, 다시 하동부로 들어온 20일에 광양 등지로 건너가서 죽인 동도가 30여 명이며, 그 밖에 총탄을 맞고 달아난 자들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조리 쫓아 흩어지게 한 뒤 하동부에 들어와 머물러 쉬었습니다.
22일에 또 광양의 섬거역(蟾居驛)으로 가서 동도와 접전하여 죽인 자들이 7, 8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나 흩어졌는데, 저들의 무리 1대(隊) 1천여 명이 광양 사평촌(沙平村)에서 배를 타고 본읍의 마전면(馬田面) 신방촌(新芳村)에서 내렸고 당일 사시(巳時, 9~11시)쯤에 부중으로 난입하였으나 우병영(右兵營)의 포군(砲軍) 100명이 때마침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던 일병 6인과 힘을 합쳐 막아서 싸우자 저 무리들이 대적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도망하여 흩어졌고, 신시(申時)쯤에 토포사가 행군하여 하동부로 들어오는 길에 저들의 흩어진 패거리를 만나 또한 대부분 쫓아내어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패거리가 아직도 광양 등지에 있으므로 포군과 일병이 본군(本郡)에 머물러 있습니다.”
라고 하고, 토포사 대구 판관(大邱判官) 지석영(池錫永)의 첩정에,
“9월 26일에 대구부(大邱府)에서 출발하여 28일에 부산항(釜山港)
감리서(監理署)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 영사관(領事官)을 찾아가서 토포하는 일을 충분히 논의하여 정한 다음 29일 □시(□時)에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통영(統營)에 도착하였습니다. 징발한 포군 100명과 영솔(領率)하는 군관(軍官) 신철회(申徹會)・정인식(鄭仁植) 등이 10월 2일에 고성부(固城府)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고성부에 머물면서 여러 고을에서 보고한 것을 받아 보니, 비류(匪類)들의 창궐이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여 그들을 토벌하고 체포할 생각에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어도 편안하지 못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리(下吏)와 교졸(校卒)을 파견하여 적정(敵情)을 탐지하고 한편으로는 군병을 보내 그들의 뒤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5일에 일병이 힘을 합치자는 부탁 때문에 곤양군(昆陽郡)으로 향하였습니다. 지나는 길에 진주(晉州)의 옛 해창(海倉)에 이르러 그 동네의 괴수(魁首) 임석준(林石俊)을 사로잡아 곤양군에 들어가 공초를 받아 보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다고 그가 이미 죄를 자복(自服)하였으므로 8일 오시(午時, 11~13시)쯤에 군성(郡城) 북쪽의 저자에 인민을 대대적으로 모이게 한 뒤 효수(梟首)하여 대중에게 경계하였습니다. 동시에 붙잡은 17명에게 일일이 공초를 받았더니 도당(徒黨)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물러나온 자도 있고 협박을 받아 억지로 따른 자들도 있어서 모두 심각하게 캐물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가볍게 처분하여 타이른 뒤에 석방하였습니다.
9일 밤에 동도 몇백 명이 하동의 안심동(安心洞) 뒤쪽 산기슭의 금오산(金鰲山) 위에 모여 있다는 보고를 들었으나 그때가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어서 나아가 토벌하기 어려웠습니다. 10일 새벽에 영솔 군관 신철 회와 정인식으로 하여금 본군(本軍)과 일병을 거느리고 함께 출발하여 접전케 하였는데 저들의 무리 가운데 총탄을 맞고 죽은 자가 8명이고 본군에게 사로잡힌 자가 21명이고 일병에게 붙잡힌 자가 9명이며 그 외에 총탄에 맞고 도주하다가 죽은 자들은 이루 셀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본군과 일병은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이 무사히 환군(還軍)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빼앗아 얻은 기계(器械)는 나팔(鑼叭) 1쌍(雙), 총 3자루, 대쟁(大錚) 1좌(坐), 북[鼓] 1좌, 도끼[斧] 1자루와 백미(白米) 5두(斗)이며, 본군이 빼앗아 가져온 것은 소[牛] 1마리[隻]였으므로 내주어 군사들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11일 밤에 진주 목사가 보고한 것을 받아 보니, 동도 몇백 명이 본주(本州)의 요천면(夭川面)과 수곡면(水谷面) 등지에 모여 있다고 하므로 12일 새벽에 진주로 행군하여 미시(未時, 13~15시)쯤에 장리(長吏)를 파견하였는데, 그가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 ‘요천면의 동도는 이미 해산하였고 수곡면은 곧 본주에서 50리 떨어진 곳인데 수천 명의 동도가 점차 패거리를 모으고 있어 성(城)이 함락될 걱정이 코앞에 닥쳤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군으로 하여금 진주에 진을 치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진군(進軍)하여 접전한 결과, 저들 무리 중에 포탄을 맞아 죽은 사람은 186명이고, 상처를 입고 도주한 자들은 그 수효를 알 수 없으며 산 채로 사로잡힌 사람은 2명이고, 죽은 기마(騎馬)는 2필(匹)입니다. 일본군으로서 다친 사람은 3명입니다. 빼앗아 얻은 기물은 총 136자루, 창 54자루, 기(旗) 3면(面), 나팔 3쌍, 연환(鉛丸)과 화약 1포(包), 소 2마리, 말[馬] 17필, 환도(環刀) 18자루입니다.
뒤이어 진주 목사가 보고한 것을 받아 보니, 동도들의 괴수(魁首)인 삼남도 도성찰(三南都都省察) 전라도 익산포(益山包)의 김상규(金尙奎)와 같은 패거리 문쌀순(文㐘順)・박범이(朴凡伊) 등 세 놈을 읍(邑)에서 붙잡아 가두었다고 하였으므로 동(同) 세 놈을 즉시 붙잡아 같은 뜰에서 엄히 캐물어 조사하였더니 그 가운데 김상규는 □□□□□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므로 즉시 동 고을의 저자[場市]에서 효수하여 대중에게 경계하였고, 문쌀순은 김상규의 꼭두각시[倀鬼]로서 전후의 행적을 또한 자복하였는데 금오산(金鰲山)의 전투에서 붙잡아 진주진(晉州鎭)에 옮겨 가두었고, 최학원(崔學元)은 죄가 동률(同律)에 관계되어 모두 즉시 총살하였으며, 박범이는 유랑하는 거지로 잠시 동안 김상규의 심부름꾼이 되었을 뿐 달리 못된 짓을 한 행적이 없으므로 우선 동 고을의 감옥에 엄히 가두었습니다.
일본군에서 고을의 덕산(德山) 등지에 동도가 떼 지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16일 새벽에 본군과 일병 100여 명이 즉시 가서 뒤를 밟았으나 조사한 결과 아무런 정형(情形)이 없었으며, 하동(河東)에 모여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려 본병(本兵)과 합세하여 진격해서 토벌하자는 다급한 기별이 있었으므로 17일 새벽에 군대를 거느리고 일찍 출발하여 하동의 황토재[黃土峙]에 도착해서 탐문해 보았는데, 일본군이 어디에서 유진(留陣)하였는지 아직 입경(入境)하지 않았습니다. 날도 저물어 전진하지 못하고 회군(回軍)하여 다시 진주에 들어와 보니, 주진(州鎭)에서 붙잡아 바친 동도가 10여 명이었으므로 갖가지 방법으로 심문한 뒤에 진주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21일에 일본군이 하동 섬거진(蟾居津)의 동도와 접전한다는 기별을 듣고 우선 병영의 포군(砲軍) 100명을 보내 힘을 합쳐 접응(接應)하게 하고 이어 즉시 행군하여 곤양군으로 들어가 머물렀습니다. 22일에 하동 가는 길을 향해 출발했는데 50리(里) 되는 갈녹재[渴鹿峙]에 도착하니 동도 몇백 명이 일본군에게 쫓겨 혹은 배를 타고 광양 등지로 가기도 하고 혹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다가 산골짜기로 들어섰을 때 뜻밖에 맞닥뜨려 육박전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들 중에 총탄을 맞아 죽은 자는 10여 명이고 사로잡힌 자는 17명이며 빼앗은 기물은 총 2자루와 환도 2자루입니다. 붙잡은 놈 중에 김달덕(金達德)・김성대(金性大)와 일본군이 붙잡은 김재희(金在僖)는 전후로 저지른 못된 짓을 이미 자복하였으므로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일본 육군 대위(陸軍大尉)가 써서 보여 준 것을 받아 보았습니다. 하동 섬거진의 전투에서 제1차는 저들 무리 중 총탄에 맞아 죽은 자가 3명이고 상처를 입고 도주한 자는 그 수효를 알 수 없으며 사로잡힌 자는 2명이고 빼앗은 기물은 기(旗) 5면(面), 총 4자루, 창(槍) 2자루, 환도 1자루, 소 2마리, 말 2필이라고 합니다. 제2차는 포탄에 맞아 죽은 자가 7명이고 사로잡힌 자가 5명이며 빼앗은 기물은 갑주(甲冑) 각 1건, 진우치(陣羽幟) 1면, 대고(大鼓) 1좌(坐), 기 3면, 총 5자루, 나팔 1쌍, 인(印) 1좌, 화약・궁시(弓矢)・창 등의 물건 약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23일에 그대로 해부(該府)에 유진하면서 포군(砲軍)을 조발(調發)하여 사방으로 흩어 보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9명을 붙잡아 철저히 캐물었더니 모두 강제로 끌려 들어간 자들이었으므로 끝까지 캐물을 필요가 없어 모두 엄곤(嚴棍) 10도(度)를 친 뒤 풀어 주었습니다.
일본군이 광양 등지에서 저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정형(情形)을 몰래 정탐하였더니 저들이 모조리 순천(順天) 등지로 도주하고 조금도 형적(形跡)이 없었으나 요충이 되는 곳을 대비하고 방어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병사(右兵使)에게 공문(公文)을 보내 해영(該營)의 포군 100명을 우선 하동부에 머물게 하되 일체 해당 부사의 절제(節制)를 따라 요해처에 파견하여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24일에 일본군은 곤양군으로 옮겨 머물고 본군(本軍)은 날씨가 춥고 의복이 얇아 병난 자들이 많아서 계속 머무르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또한 차례대로 회군(回軍)하였습니다.
26일에 본군과 일병이 곤양에서 함께 출발하여 사천(泗川)에 도착한 뒤 일병은 창원(昌原)의 마산포(馬山浦)로 향하여 장차 배를 타고 부산항(釜山港)으로 갈 것이고 토포사는 통영(統營)으로 출발하여 포군을 전송(傳送)한 다음 배를 타고 잠시 부산항에 정박하여 함께 고생한 일병을 위로한 뒤 다시 대구부로 향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군량미는 경유하는 각 읍(邑)에서 가져다가 썼으니, 지출된 수효는 읍의 보고가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 추후에 보고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금번에 하동부 등지에서 창궐한 비류들을 그들이 모이는 대로 누차 탐문하고 붙잡아 그 괴수와 패거리를 소탕한 수효가 이미 많고 그들의 기물을 빼앗은 것도 적지 않으며 달아난 여당(餘黨)은 우선 적발된 자가 없습니다. 수많은 군사가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우병사가 보낸 포군 100명을 당분간 파수(把守)하게 하고 아군과 일병은 차례로 환군(還軍)하였습니다. 뒤이어 토포사 지석영의 보고가 있었으나 하동부가 영남과 호남의 접경에 있어 앞으로의 정형을 당분간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요충이 되는 곳의 경비(警備)를 마땅히 갑절로 단속(團束)할 것을 해당 부사 홍택후에게 각별히 신칙(申飭)하였고, 또한 부근의 영(營)・읍(邑)・진(鎭)에 별도로 관문을 보내 길을 나누어 형탐(詗探)하고 낌새에 따라 응원하여 힘을 합쳐 저들을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치계(馳啓)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