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도(本道)의 농형(農形)은 이미 전후로 올린 장계(狀啓)에 빠짐없이 진달하였습니다. 신(臣)이 조령(鳥嶺)을 넘어 이곳에 부임하던 처음에 지나는 길의 상황을 살펴보았고 감영(監營)에 도착한 뒤에는 각 고을에서 올린 첩정을 자세히 열람하여 일로(一路)의 농사 형편의 우열과 재해의 정도에 대해 개략적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올해 농사는 봄철이 된 뒤로 비와 볕이 때에 알맞고 농사 초기에 쟁기질하고 써레질하는 일을 어긋나지 않게 하여 보리농사는 풍년이 들 조짐이 있고 볏모는 모내기한 곳이 많았으니 사시사철의 절후로 점쳐 보아도 거의 풍년이 들 가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5월 20일 이후로 점차 가물어 큰 시내와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 다가 관개(灌漑)한 곳을 제외하고는 땅이 단단해져 벽돌처럼 되고 시든 볏모가 비탈에 있는데도 가뭄은 더욱 심해져 비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 였습니다. 6월 초순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으나 내린 곳이 17개 고을에 불과하였는데, 많이 내린 곳은 혹 논일을 할 만하였으나 조금 내린 곳은 먼지를 적시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시내를 끼고 있는 곳은 고인 물까지 논에 대고 지대가 낮은 논은 진흙을 이용해 비벼 가며 물기가 있게 해서 가까스로 모내기를 하였으나 금세 말라 시들었습니다.
열읍(列邑)이 비를 보지 못하여 지기(地氣)가 갈수록 뜨거워지고 농사일은 점차 시기가 늦어졌는데 이후로 줄곧 극심한 가뭄이 이어져 기우제를 거의 전체 도(道)에서 두루 지내고 있으며 비가 내리기를 바란 지도 어느덧 삼경(三庚)이 지났습니다. 대천(大川)은 거의 물의 흐름이 끊어질 지경이고 저수지와 못은 모두 먼지가 일고 있으며, 낮고 습한 땅도 모내기를 하지 못한 곳이 많으니 높고 건조한 곳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모내기한 것을 말하더라도 줄기와 잎이 이미 시들어 속과 뿌리까지 모두 말랐습니다.
항아리로 물을 길어 부어 주고 두레박을 매달아 물을 대고 싶으나 계곡의 시내를 10길[丈]이나 파도 샘의 근원이 이미 말랐고 여름 석 달 동안 논일에 지칠 대로 지쳐 인력도 부족합니다. 온갖 계책과 방법으로도 구제할 가망이 없는데 그 위에 또 후덥지근한 바람마저 항상 불어 뜨거운 더위가 갈수록 치성하니 결국에는 고지대나 저지대나 언덕이나 습지나 똑같이 화로가 되어 버려 활활 타올라 온 들판이 모조리 벌겋게 되고 빈 들판에 푸른 것이라곤 없으며, 심지어 대파(代播)한 씨앗까지도 싹이 나려다 말기도 하고 겨우 싹이 났어도 금세 말라 죽었습니다. 그 밖에 땅이 굳어 파종하지 못한 곳으로 황폐한 농토와 버려진 땅이 눈에 가득하여 쓸쓸하기만 하였습니다. 신이 기우제를 거행하면서 지나는 길을 직접 살피고 참혹한 실상을 직접 보았으니 이 몇 고을을 미루어 나머지 고을도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덧 가을이 이르러 농사의 풍흉은 판가름 났는데, 7월 20일 이후로도 11개 고을에 소나기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곧 옥초(沃焦)와 같아 해갈(解渴)될 가망이 없으니, 하물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채 곧장 8월 초순을 맞이한 고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오직 수원(水源)이 애초부터 넉넉했던 곳만 올벼[早稻]가 뿌리까지는 마르지 않았고 대파한 각 곡식은 싹이 난 것이 다행히 늦게 내린 비 덕분에 늦게나마 수확할 가망이 있었으나 김매고 북돋아 줄 때 이미 기름지지 못하여 이삭이 팬 뒤에도 여물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고 있으니 논두렁에 있는 것은 절반이 넘게 쭉정이고 수확한 것은 모두 빈껍데기뿐입니다.
콩과 팥, 기장과 조의 경우는 곳곳마다 말라 죽는 상해를 입었고 이른바 남아 있다고 하는 것도 기름진 땅에 심어 6월 초순과 7월 20일쯤에 내린 비를 맞은 것이 전부여서 간혹 여물기는 했어도 종자로 쓸 만한 것을 찾아보면 천백(千百)에 십일(十一)을 넘지 못합니다. 목면(木綿)은 비록 가뭄을 잘 견디는 품종이기는 하지만 비가 내려 적셔 줌이 전무하다 보니 얇은 모래땅에 심은 것은 뿌리가 금세 말랐고 기름진 밭에 심은 것은 겨우 듬성듬성 남아 있습니다. 막 핀 꽃은 햇볕에 시달려 시들거나 타 죽고 어렵게 맺힌 송이는 바람에 흔들려 떨어졌습니다. 큰 밭에서 터진 것을 주워 담아도 광주리를 채우지 못하였으니, 온 도내의 면재(綿灾)는 천심(淺深)을 구별할 것이 없으므로 등급을 나누는 조항 전부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도내 농사의 개략적인 상황입니다.
본도의 한재(旱災)는 반드시 병자년(1876, 고종13), 계미년(1883),
무자년(1888)을 꼽는데 올해의 가뭄은 거의 병자년, 계미년, 무자년 같은 해보다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삼농(三農)이 똑같이 흉작이고 오곡(五穀)이 모두 끝내 병들었으며 심지어 아예 파종하지 못했던 그 때를 도리어 농사를 잘한 셈이라고 말한다면 비록 막말 같지만 그 실상을 증험할 수 있습니다. 도내 전체를 통틀어 억지로나마 우열을 구별하자면, 협농(峽農)이 그래도 연읍(沿邑)보다 나으나 비탈이 심한 땅은 노위(魯衛)처럼 차이가 없고, 답곡(畓穀)이 전종(田種)보다 조금 나으나 지대가 높고 건조한 곳은 등설(滕薛)과 같은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모두가 골고루 큰 흉년이라 하겠습니다.
대개 이 영남의 백성들이 연거푸 흉년을 당하고 올해 또 혹독한 가뭄을 만나 일 년 내내 고생만 하고 끝내 수확한 것이 없이 쌀독도 모두 바닥나고 베틀도 이미 비었습니다. 유랑하는 백성들이 길에 가득 이어지고 부세(賦稅)를 감면해 달라는 호소는 온종일 몰려드니, 눈앞에 참혹한 모습이 이미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까운데 앞으로 이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계책이 전혀 없으니, 신은 이에 방 안을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백성에 대한 근심이 깊으신 성상께서 영남 백성들의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돌아보시고 선유사(宣諭使)에게 명하여 백성들을 위무(慰撫)하고 내탕전(內帑錢, 임금이 사적인 용도로 쓰는 돈)을 풀어 구휼하시는 한편 백성의 고질적인 폐단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일체 바로잡고 혁파하셨으니,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은택이 백성들의 골수까지 흡족하게 미쳤습니다.
신은 우러러 성상의 염려를 동감하여 백성을 편하게 품어 주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방도를 두고 방책을 강구하기에 모든 힘을 다해 선양(宣揚)하고자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백성들의 고충을 보살피는 정사는 전적으로 급재(給災) 한 가지 사항에 달려 있습니다. 가늠하고 헤아려 등급을 나누는 일을 잘 살피고 신중히 해야 하는 데, 이미 논한 재해 상황이 모두 평년(平年)의 우심(尤甚, 재해의 정도가 심함)에 해당하는 것들이고, 초실(稍實, 농사가 약간 알차게 되었음)의 명색은 논의하기조차 어렵습니다. 3등(等)으로 나누는 일은 곧 상례(常例)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 완전히 재해를 입은 것은 아니고 조금이나마 먹을 게 나오는 전답은 초실(稍實)에 두고 나머지는 재해의 심한 정도를 구별하여 지차(之次)와 우심(尤甚)에 두어 뒤에 열거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재해의 허실을 점검하는 일은 중대한 정사입니다. 위로는 나라의 회계(會計)에 관계되고 아래로는 백성의 고충에 관계되니,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지나친 것과 모자란 것이 모두 죄가 됩니다. 올해와 같은 경우에 만약 재해를 입은 정도에 따라 집총(執摠)한다면 도내 전체의 결총(結摠, 전결의 총수) 중에 재결(災結)이 되지 않는 전답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두려운 나머지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사목(事目)이 내려오기 전에 수령들을 대면하여 칙유(飭諭)하였고 개장(槪狀)이 이미 도착한 뒤에는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별도로 번답(反畓, 밭을 논으로 만듦)을 탐문하여 내분재(內分災)와 대파(代播)하여 먹을 것을 수확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논하지 말도록 하였으며, 전체가 아예 버려져 한 알의 곡식도 수확하지 못했다고 하는 곳은 반드시 여러 번 점퇴(點退, 점검하여 퇴짜를 놓음)하여 십분 정당하게 결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미이재(未移災, 모내기를 못한 재결)가 1만 933결 93부 4속, 고손재(枯損災, 농작물이 말라 손해 본 재결)가 4만 344결 49부 1속, 직립재(直立災, 이삭이 여물지 않은 채 서 있는 재결)가 1만 1,263결 59부 8속인데, 이를 모두 합한 재결이 6만 2,542결 2부 3속입니다.
이와 같은 농사 형편에서 재결이 그나마 이 수효에 그친 것은 실로 처음 생각한 수효가 아니니 도리어 재결을 깎아 줄인 점이 있습니다. 비록 이대로 준표(準俵)를 받더라도 집재(執災)하지 않은 번답과 7, 8분이나 재해를 입고도 삭감당한 백성들은 오히려 재결에 포함되어야 마땅한데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원통함을 호소할 단서가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이에서 또 삭감된다면 전수(全數)를 피재(被災)한 자들에게 어떻게 세금을 내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재해는 정밀하게 집재(執災)하고 집재한 것을 그대로 준표하는 것이 아마도 넉넉한 곳에서 덜어내어 부족한 곳에 보태 주는 정사에 부합할 것입니다. 위 항의 재결 6만 2,542결 2부 3속을 특별히 준획(準劃)하도록 허락하시면 신은 삼가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일일이 균등하게 표재(俵災)하여 이 위태로움에 빠진 백성들로 하여금 유례없는 은택을 입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년(各年)의 천포결(川浦結)과 큰물로 인하여 개펄이 쌓인 곳에 대해서는 열읍에 각별히 신칙하여 철저히 조사해 골라내게 하였더니 가경전(加耕田)이 1결 5부 3속이고 조사하여 찾아낸 것이 26부 1속이며 개펄이 쌓였다가 다시 기경(起耕)한 것이 4부 3속으로, 이를 모두 합계하면 1결 35부 7속입니다. 이는 평상시에 경작하고 있으면서도 숨겨 양안(量案)에서 누락된 것으로, 양안의 진기전(陳起田)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모두 당년에 세금을 내도록 하였고, 새로 환기(還起)한 전답 8결 62부 8속은 양안(量案)에 현록(懸錄)하고 법전에 따라 3년 간 면세해 주어 농사를 권면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덧붙여 진달할 만한 그밖의 여러 사항을 후록(後錄)하여 치계(馳啓)하오니,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우심(尤甚) 37읍(邑)
경주(慶州) 창원(昌原) 진주(晉州) 성주(星州) 대구(大邱) 울산(蔚山) 김해(金海) 영해(寧海) 밀양(密陽) 동래(東萊) 선산(善山) 인동(仁同) 칠곡(漆谷) 하동(河東) 거제(巨濟) 고성(固城) 초계(草溪) 흥해(興海) 양산(梁山) 함안(咸安) 곤양(昆陽) 김산(金山) 영덕(盈德) 남해(南海) 의령(宜寧) 청하(淸河) 진해(鎭海) 단성(丹城) 영일(迎日) 장기(長鬐) 영산(靈山) 창녕(昌寧) 사천(泗川) 기장(機張) 웅천(熊川) 자인(慈仁) 칠원(柒原)
지차(之次) 21읍
안동(安東) 상주(尙州) 청도(淸道) 영천(永川) 예천(醴泉) 합천(陜川) 의성(義城) 경산(慶山) 개령(開寧) 하양(河陽) 용궁(龍宮) 언양(彦陽) 진보(眞寶) 지례(知禮) 고령(高靈) 현풍(玄風) 군위(軍威) 의흥(義興) 신녕(新寧) 삼가(三嘉) 비안(比安)
초실(稍實) 13읍
청송(靑松) 순흥(順興) 거창(居昌) 문경(聞慶) 함양(咸陽) 영천(榮川) 풍기(豐基) 봉화(奉化) 함창(咸昌) 산청(山淸) 예안(禮安) 영양(英陽) 안의(安義)
1. 갖가지 면세결(免稅結)은 삼가 탁지아문이 계하(啓下)받아 보낸 관문에 따라 모두 세금을 내도록 하겠음.
1. 각 읍의 진결(陳結)과 재결(災結) 가운데 예전에 탈결(頉結, 사고로 인하여 면세하는 전결)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삼가 의정부가 계하받아 보낸 관문에 따라 각별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으니 그 보고가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 추후에 등문(登聞)하겠음.
1. 진주(晉州)의 강(江)에 인접한 10여 면(面)의 천포전(川浦田) 500 결이 억울하게 징세된 사항은, 지난 기축년(1889, 고종26)에 특별히 조정에서 각별히 염려해 준 은택을 입어 5년간 세금을 감면하였는데, 그 기한이 이미 지났으나 개펄이 쌓여 경작할 기약이 없다고 이번에 해읍(該邑)이 논보(論報)하고 백성들이 호소하였으므로 막 적간(摘奸)하도록 하였으니 추후에 등문하겠음.
1. 올해 목면(木綿)의 재해는 이전에 보기 드물 정도로 심하여 삼가 새 정식(定式)에 따라 각 군목(軍木)을 이미 대전(代錢)으로 마련하였음. 본색(本色)에 비하면 비록 무명을 짜서 납부하는 괴로움은 없지만 새로 정한 값이 곧 시가인 만큼 돈이든 무명이든 백성이 납부하는 것은 똑같음. 그런데 과거에 목면이 흉작인 해에는 허대(許代, 대전(代錢)을 허락함)를 감분(減分)해 준 때가 많았으므로 가난한 마을에 사는 백성의 기대는 이 일을 끌어다가 전례로 여기거니와 민력(民力)이 바닥나 어렵고 부족하여 그 실정이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운 만큼 별도로 사정을 생각해 주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전에 감분(減分)해 준 사례에 따라 6냥으로 정가(定價)한 각 군목은 3분의 1에 한하여 원래의 대전(代錢)에 부치게 허락하고, 5냥으로 정가한 장악원(掌樂院)과 교서관(校書館)의 목면은 모두를 원래의 대전에 부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음.
1. 우심읍(尤甚邑)에 대해서는 내년 가을까지 배소(配所)로 정하지 말고 노비를 추쇄(推刷)하거나 빚을 징수하는 일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