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兩湖)의 비류들을 경비(警備)하기 위해 김산(金山)과 지례(知禮) 두 읍에 남영(南營)의 초관(哨官)들을 나누어 보내 군병을 거느리고 가서 막아 지키게 하고서 그러한 연유를 조금 전에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차례로 연이어 도착해 김산에 출사(出使)한 초관 장교혁(張敎赫)의 수본(手本)에,
“추가로 보낸 병정(兵丁) 50명이 이달 초2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동군(同郡) 추풍역(秋風驛)에 사는 우석(禹錫)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접주(接主)로 폐단을 일으킨 것들이 많았으므로 당일 2경(二更, 21~23시) 초에 몰래 염탐하여 붙잡아 다음 날에 김천(金泉) 시장에서 물고(物故)를 내어 대중을 경책하였습니다. 동군 마좌산(馬左山)에 사는 김성심(金性心)은 곧 김천의 접주인데 성주(星州)에서 변란을 일으킬 때 군기(軍器)를 탈취한 자이므로 몰래 수색하고 탐문하였더니 낌새를 알아채고 먼저 달아났으나 조총(鳥銃) 2자루, 환도(環刀) 1자루, 연약(鉛藥) 1봉(封), 징(鉦) 1좌(坐), 매구(鋂口) 1좌, 난삼(鸞衫) 1건(件)이 그자의 집에 남아 있었으므로 거두어 군중(軍中)에 회부하였습니다. 일찍이 대구(大邱)의 진졸(鎭卒)이었던 김삭불(金朔不)이 난류(亂類)들과 작당하여 남의 돈과 재물을 탈취하였으므로 초4일에 붙잡아 조사한 뒤 곤장을 쳐서 물고를 냈습니다. 호서(湖西)의 상황을 탐문한 결과 동도 수만 명이 경군(京軍) 및 일병과 공주(公州)에서 접전한 뒤 무리들이 은진(恩津)과 놀미(㐗味) 등지로 물러나 머문다고 하니 각처를 막아 지키는 일을 별도로 한층 더 단속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례에 출사한 초관 이완근(李完根)의 수본에,
“이달 초1일에 행군하여 전진하다가 거느린 병정 100명 중에 50명은 2일에 김산에 출사한 초관 장교혁에게 보냈고, 50명은 초3일에 거느리고 지례현으로 갔더니 지례현의 읍군(邑軍)과 민정(民丁)이 총, 창, 칼, 돌멩이를 준비하여 각처를 막아 지키는 자들이 족히 3,000여 명은 되었고 읍저(邑底)에 수직(守直)하는 군사도 300여 명은 되었는데 동읍(同邑)의 군정 등이 말 앞에 와서 호소하기를, ‘성주(星州)에 사는 석명서(石明瑞)는 동도의 괴수(魁首)로서 가까운 지역에 출몰하여 다시 기포(起包)하려고 할 무렵에 여러 백성들이 힘을 합쳐 그를 찾아내 붙잡았다.’고 하므로 엄중히 조사하여 자백을 받아내고 그 자리에서 물고(物故) 냈습니다. 초4일에 전탐(轉探)해 보니 금산(錦山)에서 변란을 일으킨 도당(徒黨) 1대(隊)는 용담읍(龍潭邑)에서 이미 안의현(安義縣)의 육선령(六先嶺)을 넘어 해당 현(縣)의 군병과 대치하고 있고, 1대(隊)는 황간(黃磵)과 영동(永同)에서 기포하여 장차 김산과 지례로 향할 것이고, 1대는 무주(茂朱)와 무풍(茂豐) 등지에 모여 있는데 장차 지례현의 덕산령(德山嶺)과 부항령(釜項嶺)을 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초8일에 탐문해 보니 안의현의 육선령을 넘어간 패거리들은 해당 현의 서상동(西上洞)에 들어갔다가 읍군(邑軍)에게 쫓겨 도로 호 남으로 넘어갔다고 하며, 무주와 무풍에 모여 있는 무리들은 해산하여 돌아가 이웃 경내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뜻을 지례현의 민회소(民會所) 에 사통(私通)을 보내왔으나 비류들의 간사한 꾀를 그대로 믿기 어려워 계속 정탐하였더니 저들 무리가 애당초 해산하여 돌아가지 않고 도리어 황간・영동의 포(包)와 세력을 합쳐 무주읍에서 무풍까지 40리(里)나 연결되어 있으므로 군정(軍丁)을 단속하여 요해처의 입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 수본의 내용입니다.
양호의 비류들이 한결같이 창궐하고 있어 상황을 극도로 헤아리기 어려우니 요충지의 경비를 한층 더 단속해야 하겠기에 별도로 출사한 초관 등에게 별도로 제칙(題飭)하였고, 이어 부근의 읍과 진(鎭)에 관문을 발송하여 그들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형탐(詗探)하고 기미를 따라 응원(應援)하여 드러나는 대로 소탕하여 잡아들이도록 꾀하였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차근차근 등문(登聞)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연유를 아울러 치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