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도착한 동래 부사(東萊府使) 민영돈(閔泳敦)의 등보(謄報)에, “이달 초4일 유시(酉時, 17~19시)에 도착한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종길(李鍾洁)의 긴급한 통문에 ‘겸대 역학(兼帶譯學) 백운배(白運培)의 수본(手本)을 받아 보니 ‘동학당(東學黨)을 정탐하기 위해 올해 9월 24일에 화륜선(火輪船, 기선(汽船))을 타고 창원(昌原) 등지로 향해 출발한 일본 육군 병대(兵隊) 100명은 당초에 소지한 포총(砲銃)과 도검(刀劍)을 그대로 지니고 우리나라에서 모집한 군병 109명은 각자 행장을 소지하여 당일 미시(未時, 13~15시)에 육지를 경유하여 다시 감리서(監理署)에 도착하니 주사(主事) 정약임(丁若臨)과 이상만(李尙萬)도 순사(巡査) 최기호(崔琪浩)・김성병(金聖柄)・김정안(金正安)・김학도(金學道)・김봉문(金奉文), 사령(使令) 5명, 순포(巡捕) 5명을 거느리고 동 시에 모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탐정한 내용이 어떠한지 물었더니 육군 병대장(兵隊長)의 말이 「우리 일행이 귀국(貴國)의 감리(監理) 일행 및 모군(募軍) 등과 올해 9월 24일에 왜관(倭館)에서 화륜선을 타고 출발하여 같은 날 창원의 마포(馬浦)에 도착해 뭍에 내려 유숙하였고, 25일에 육지를 통해 출발하여 하동(河東)의 길로 행군하다보니 동학당이 하동과 광양(光陽) 등지에 모여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조금씩 전진하여 29일에 하동부에 이르니 과연 소문과 같았다. 여러 날을 그곳에 머물다가 10월 14일에 군대를 이끌고 광양에 도착하여 총포를 쏘며 접전하여 사로잡아 감리서로 압송(押送)한 자가 13명이고 포격에 죽은 자가 186명이고, 기마(騎馬) 6필(匹), 조총(鳥銃) 135자루, 유쟁(鍮錚) 1좌(坐)를 탈취하였으며, 나머지 패거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고 우리 일행 중에는 한 사람도 다친 자가 없었다. 같은 달 16일에 다시 곤양군(昆陽郡)에 도착하여 머무르니 더 이상 남은 패거리들이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24일에 그곳을 떠나 출발하여 오늘 왜관에 도착하였다.」 하였는데, 감리서 주사가 말한 내용도 그와 똑같았습니다.’라고 한 수본에 근거하여 급히 알립니다.’ 하였으므로 그 연유를 치계합니다.”
라고 장계(狀啓)를 등보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치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