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도착한 전라도 운봉 영장(雲峯營將) 이의형(李義詗)의 첩정에,
“이달 14일 축시(丑時, 1~3시)쯤에 읍의 서쪽 15리(里)에 있는 관음재[觀音峙]를 정탐하는 군졸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도(賊徒) 수만 명이 고개[峙] 밑에 있는 남원(南原)의 동면(東面) 지역 부동촌(釜洞村) 앞에 와서 모였는데 차차 산허리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바야흐로 재를 뚫고 넘으려고 합니다.’ 하였으므로 급히 수성군(守城軍)을 조발(調發)하여 신칙해 달려가게 할 때에 양호도순무영의 참모관(參謀官)인 전(前) 주서(注書) 박봉양(朴鳳陽)이 지금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으로서 기복(起復)하여 행공(行公)하라는 전지(傳旨)를 받자마자 이 다급한 경보(警報)를 듣고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호남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과 함께 의사(義士)들을 앞장서 거느리니, 그 중에 총을 든 자들은 80명이고 창을 가진 자들은 100여 명으로 수성(守城)하는 군졸 300여 명과 함께 용감히 적진(賊陣)으로 달려가 그들을 맞아 쳐서 크게 전투를 벌였습니다.
같은 날 인시(寅時, 3~5시)부터 15일 진시(辰時, 7~9시)까지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을 때에 동 참모관 박봉양이 몸소 사졸들보다 앞장 서서 손수 그들의 괴수 다섯 놈을 베어 죽이니 적의 기세가 마침내 꺾이고 아군의 사기(士氣)는 더욱 치솟아 수만 명이나 되는 적들의 무리가 그대로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승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토벌하는 동안에 저들 무리 중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은 자를 모두 계산하면 560여 명이고, 패하여 달아나다가 돌멩이에 맞거나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은 채 도망하여 촌락의 계곡과 도로 옆에 쓰러져 차례로 죽음에 이른 자들도 수천 명을 밑돌지 않습니다. 빼앗은 무기 중에 총, 창, 칼, 화살과 약환(藥丸), 갑주(甲冑) 등 물건의 수효 또한 매우 적지 않으며, 아군으로서 죽거나 다친 자들도 30여 명이나 되니, 당일의 광경은 참으로 근고(近古)에 드문 전장(戰場)인데 적은 수효로 많은 적을 대적한 것은 실로 뛰어난 이 사람의 월등한 충용(忠勇)과 담략(膽略)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승을 보고하고 상전(賞典)을 요청하여 의로운 기개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일은 마땅히 잠시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도의 순영(巡營)은 그 사이에 전후임이 교대하는 시기를 만나 사무(事務)를 폐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도로가 막혀 관첩(關牒)을 통할 수 없었으며 병영(兵營)은 길이 너무 멀어 공사(公使)가 막히고 끊겼으니 민망하고 안타까운 정상을 일일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군무(軍務)를 보고하고 첩서(捷書)를 계문(啓聞)하는 일을 관할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시행하기를 망설여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므로 출진(出陣)한 사람들의 성명(姓名)을 수종(首從, 앞장선 자와 뒤따른 자)으로 나누어 순서대로 적고 아울러 빼앗은 무기의 수효 및 아군의 사상자의 성명까지 정리하여 책자를 만들어 치보하니, 특별히 계문하여 포상을 요청해 줌으로써 격려하고 권장하는 의리에 더욱 힘쓰고 잘 마무리 짓는 효과를 책임지게 해 주십시오. 그 밖에 요해처를 방어하고 성(城)을 수비한 사람들로 공로가 가장 뛰어난 자들을 계속하여 또 찾아 보고할 계획입니다. 아, 저 흉도(凶徒)들이 한번 전투에서 패한 뒤로 다시 남원성 안과 각 면(面), 각 촌(村)에 의거하여 남은 패거리들을 불러 모으고 있어서 정형(情形)을 예측할 수 없으니 특별히 가까운 고을의 포군(砲軍)을 조발하여 즉시 서둘러 달려와 원조하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근일에 호남의 적도들이 온 도내에 두루 가득하여 연거푸 많은 고을을 함락시키고 성세(聲勢)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서 소문만 듣고도 놀라던 중입니다. 지금 이 운봉현은 손바닥만 한 작은 지역으로 매우 높은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어 남아 있는 민호(民戶)가 1,000여 호에 불과하고 수비하는 군졸이 겨우 300명인데도 수효가 적은 군졸을 거느리고 저 수만 명이나 되는 무리와 대적하여 무찔러 죽인 목숨이 이렇게 많고 빼앗은 무기도 심히 적지 않습니다. 통쾌하게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마침내 큰 승리를 보고하였으니 해당 영장 이의형이 인민(人民)을 진무(鎭撫)하고 토병(土兵)을 교련(敎鍊)하여 별도로 방략(方略)을 베풀어 이렇게 성효(成效)가 있게 한 것은 능히 지방관의 직임을 다한 것이니 마땅히 포상하는 정사를 시행해야 됩니다. 참모관 박봉양은 남보다 앞장서서 창의(倡義)하고 민정(民丁)을 모집하여 훈련하였으며, 위기에 임하여 힘을 분발하고 몸소 다섯 괴수를 베어 죽였으니, 그 충용과 담략이 사람들로 하여금 흠탄(欽歎)하게 합니다. 이처럼 특출한 공훈은 마땅히 특별한 상전을 시행해야 합니다. 소모관 백낙중은 힘을 합쳐 창솔(倡率)하고 힘을 거들어 함께 일을 해냈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에 있어 또한 마땅히 포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마땅히 해도(該道)에서 장문(狀聞)할 일이지 신의 감영에서 계청(啓請)할 일은 아니나, 그 흉악한 패거리들이 길을 막고 있음으로 인해 이렇게 공첩(公牒)이 지체되고 막힌 것이니, 한시가 급한 첩서(捷書)라 이렇게 포상을 요청합니다. 일이 다른 도(道)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상례(常例)만 고수할 수 없으므로 아울러 해당 진(鎭)이 보고한 책자를 뒤에 기록하여 등문(登聞)합니다. 동(同) 영장 이의형, 참모관 박봉양, 소모관 백낙중 및 공훈을 세운 여러 사람에 대해 등급을 나누어 포상하고 장려하는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 게 하소서. 아군 중에 죽은 자는 묻어 주고 다친 자는 치료해 주는 일도 별도로 더 제칙(題飭)하여 각별하게 보살펴 주도록 하였고, 흉도들이 아직도 경계하여 수그러들지 않고 또다시 무리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이것은 더욱 통분할 노릇이므로 부근 고을인 함양(咸陽)과 안의(安義) 두 읍의 포군을 조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화급히 서둘러 달려가 구원하고 합세하여 토벌하고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아울러 치계합니다.
다음은 전라도 운봉현 관음재에서 적을 토벌할 때 공로를 바친 사람들의 수종(首從), 직(職), 성명 및 탈취한 군물(軍物)의 건기(件記)와 아군 중에 죽거나 다친 자의 수효를 기록한 건질(件秩)임.
참모관 전 주서 박봉양은 창솔(倡率).
소모관 백낙중은 창솔.
전(前) 군사마(軍司馬) 김응진(金應鎭), 전 군수(郡守) 김정수(金鋥銖), 전 찰방(察訪) 박봉규(朴奉圭), 전 오위장(五衛將) 박형철(朴炯喆), 유학(幼學) 박양준(朴良俊), 유학 이봉권(李奉權), 유학 박수목(朴壽睦), 유학 최대룡(崔大龍), 유학 오영복(吳永福), 이방(吏房) 박 광식(朴光植) 이상 10명은 종정(從政)하였음.
전 영장(營將) 박귀진(朴貴鎭), 유학 박홍조(朴洪祚) 이상 2명은 군량미 운반.
호장(戶長) 박일화(朴一華)는 호궤(犒饋).
군관(軍官) 지성복(池成福)은 참모(參謀).
빼앗은 군기(軍器)의 목록
불란구(佛蘭口) 3자루, 양총(洋銃) 2자루, 천보총(千步銃) 15자루, 조총(鳥銃) 362자루, 삼혈총(三穴銃) 3자루, 환도(環刀) 31자루, 장전(長箭) 1,003습, 철편(鐵鞭) 22자루, 철창(鐵槍) 55자루, 화약(火藥) 305근(斤), 연환(鉛丸) 5두(斗), 철환(鐵丸) 3두, 백포장(白布帳) 7건(件), 차일(遮日) 5건, 기치(旗幟) 83면(面), 피갑(皮甲) 33건, 피주(皮冑) 29건, 방패(防牌) 55건, 동노구(銅爐口) 3좌(坐), 소[牛] 1마리[隻]
아군(我軍) 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성명 목록
최암회(崔岩回), 김영호(金永浩), 윤원근(尹元根), 강영문(姜永文), 김이성(金二成) 이상 5명은 총탄에 맞아 사망함.
박삼홍(朴三弘), 성문길(成文吉), 양준영(梁俊永), 송만석(宋萬石), 김중이(金仲伊), 탁성수(卓成秀), 윤계남(尹季男), 김창길(金昌吉), 방달봉(房達奉), 홍소영석(洪小永石), 박효순(朴孝順), 곽명운(郭明云), 최석금(崔石金), 신순조(申巡祚), 임동이(林童伊), 박영만(朴永萬), 박동이(朴童伊), 장두환(張斗煥), 황함안(黃咸安), 이매계(李梅溪), 김자형(金子亨), 정선중(鄭先中), 이윤옥(李允玉), 이화실(李化實), 조군기(趙軍器) 이상 25명은 총탄에 맞아 다쳤으나 상처가 깊거나 위중하지 않아서 지금 한창 구료(救療)하는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