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도착한 함양 군수(咸陽郡守) 김영순(金永順)의 첩정에,
“본군(本郡)의 포군(砲軍)과 민정(民丁) 가운데 정예하고 건장한 자들로 우선 100명을 조발(調發)하여 전라도 운봉현(雲峯縣)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추후에 도착한 운봉현 여원치(女院峙) 방수장(防守將)이 보낸 사통(私通)에 ‘11월 25일에 남원(南原) 노담촌(魯坍村)을 방수(防守)하는 백성이 동학의 무리 6명을 붙잡아왔습니다. 28일에는 운봉현의 창의군(倡義軍)과 각 읍의 구원병이 즉시 남원의 결진성(結陣城) 밖으로 가서 한밤중까지 동쪽과 남쪽의 두 문을 불태우고 성안에 주둔해 있는 비류들을 들이쳤는데,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83명이고 사로 잡은 사람이 30여 명으로 그 무기를 모조리 빼앗았습니다. 도망하여 흩어진 패거리를 기어코 탐색하여 붙잡은 뒤에 회군(回軍)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운봉현의 군정(軍丁) 중에 1명이 총탄에 맞아 죽고 3명은 총에 맞아 중상(重傷)을 당하여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며, 함양군의 포군 중에 2명 역시 총탄에 맞았으나 심한 총상은 아닙니다.’ 하였으므로 연유를 치보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 첩정의 내용입니다.
호남의 비류들이 남원에 주둔하여 경계를 엿보아 침범하는 짓이 갈수록 몹시 악독한데 이번에 운봉현의 의군(義軍)과 본도의 구원병이 합세하여 달려가 위험에 나아가 분발하고 애써서 많은 수의 적당(賊黨)을 소탕하고 무기를 빼앗았으니 참으로 매우 가상합니다. 그리고 남은 패거리를 추포할 방책과 요해처 입구를 막아 지킬 책략에 대해 별도로 신칙하였습니다. 아군 중에 죽은 자는 묻어 주고 다친 자는 치료하는 등의 일을 각기 해당 지방관에게 연거푸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별히 구휼(救恤)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치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