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도착한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만윤(李晩胤)의 첩정에,
“11월 20일에 일인(日人) 대장(大將) 1명이 외무아문(外務衙門)의 관문(官文)과 양호 도순무영의 전령(傳令)을 가지고 비당(匪黨)을 소탕하는 일로 일본 군사 150여 명을 거느리고 함창(咸昌)의 태봉(台峯)에서 부(府)로 들어와 유숙(留宿)하고, 21일에 개령현(開寧縣)으로 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개령현 삼공형(三公兄)의 문장(文狀)에,
“11월 22일에 일본 군사 170인이 부에 들어와 유숙하고, 23일에 읍부(邑部)에 사는 송대흥(宋大興)과 의생(醫生)인 아전 배만기(裵萬箕)를 전날 도당(徒黨)에 가입한 죄로 모두 즉시 총살한 뒤에 김산(金山) 길로 출발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례 현감(知禮縣監) 이재하(李宰夏)의 첩정에,
“11월 24일에 일본 군사 120인이 김산 길을 경유하여 본부(本府)에 도착하여 유숙하고, 25일에 거창(居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정관섭(丁觀燮)의 첩정에,
“11월 26일에 양호 도순무영의 별군관(別軍官) 오인경(吳仁庚)이 일본 군사 192인에 대솔(帶率)한 군사를 합한 220인이 강원도에서 본부에 도착하여 유숙하였습니다. 공궤(供饋)하는 일을 일체 그들의 요청에 따라 시행하고 또 태우(太牛) 1마리[隻], 활계(活鷄) 30수(首), 계란 500개를 공급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남원(南原) 등지의 적도(賊徒)를 소탕하기 위해 본읍의 장색(將色, 패장(牌將)과 색리(色吏))을 대동하고 27일에 전로(前路)인 안의현(安義縣)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안의 현감(安義縣監) 조원식(趙元植)의 첩정에,
“11월 27일에 일본 군사 200여 인이 거창부(居昌府)에서 본현에 도착하여 유숙하고 28일에 함양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함양 군수(咸陽郡守) 김영순(金永順)의 첩정에,
“11월 28일에 일본 군사 250여 명이 안의현에서 본군에 도착하여 유숙하고 호남의 동도를 소탕하려고 29일 새벽에 운봉현을 향하여 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 첩정과 문서의 내용입니다.
호남의 비류들을 누차 소탕하였으나 끝내 수그러지지 않으니 갈수록 놀랍습니다. 이번에 지나간 일본 군사의 수효는 열읍(列邑)의 보고가 각기 저마다 똑같지 않아 그 수효가 적확(的確)하지 않습니다. 거행한 것으로 보자면 소홀함이 없지 않으므로 엄중한 말로 제칙(題飭)하였습니다. 공궤(供饋)하고 수접(酬接)하는 절차와 정탐(偵探)하고 응원(應援)하는 방책에 대해서는 각기 해당 읍에 각별히 신칙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치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