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도착한 동래 부사(東萊府使) 민영돈(閔泳敦)의 첩정에,
“본부(本府)가 왜(倭)와 교린(交隣)한 이후부터 왜관(倭舘) 안에 수문(守門)과 설문(設門) 두 문을 설치하고 군교(軍校) 중 2인을 문장(門將)으로 차정(差定)하여 관무(舘務, 왜관의 사무)를 살펴 변장(邊將)에게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6년을 근무한 뒤에 수문장(守門將)은 각 진의 변장에 조용(調用)하고 설문장(設門將)은 금정 별장(金井別將)에 자벽(自辟)하는 자리로 삼았습니다. 수문과 설문이 철거된 뒤로는 수문장은 남수문장(南守門將)이 되어 남성(南城)에서 수직(守直)하고 설문장은 구검 감관(句檢監官)이 되어 왜관에서 수직하면서 변보(邊報)를 처리하고 일본인을 조검(照檢)하는 제반 사무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이전과 비교해 이름은 다르나 임무는 똑같으며 일이 많고 소임이 중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조용을 전례대로 준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수년 전부터 변장 자리가 적어 남수문장으로 오래 근무한 자가 끝내 변장에 조용되지 못하자 이 일로 군교(軍校)가 경영(京營, 서울에 있는 군영(軍營))으로 달려가 호소하고 본부(本府)가 병조에 전달하여 보고한 것도 이미 여러 차례였으나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구검 감관으로 구근(久勤)한 사람이 가는 자리인 별장(別將)은 일찍이 본부가 자벽하였기 때문에 과연 원래 정해진 과한(窠限)이 있어 규례대로 후보자를 보고하여 전차(轉差)하였습니다. 그런데 계미년(1883, 고종20)부터 서울에서 구근한 사람 중에서 차정(差定)하면서 그 당시에 병조에서 ‘서울의 구근과 본부의 구근을 막론하고 이제부터는 번갈아 차하(差下)하겠다’는 내용의 관문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는 과연 교대로 차하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연속하여 자벽하던 자리가 번갈아 차하되는 자리로 된 것도 오히려 모두 답답하게 여겼는데 금년에 이르러서는 또 서울의 구근이 연속하여 차하되면서 수백 년간 이어온 규례는 자연 말할 것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십 년이나 구근을 하고도 결국은 낙사(落仕)하고 마니, 많은 군교들이 일제히 실망하여 거의 대부분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일일이 아뢰고 감히 이렇게 청하는 내용으로 보고를 올리니 특별히 실상을 들어 장계(狀啓)로 보고하되 구검 감관의 구근과는 전례대로 금정 별장에 자벽하여 길이 과한을 정하고 본부에서 후보자를 보고하게 하며, 남수문장의 구근과는 가까운 읍의 변장에 역시 자벽으로 정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변부(邊府)의 군교들로 하여금 그 원통하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 줌으로써 권장하는 바탕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 첩정의 내용입니다.
이곳 동래부의 군교를 구근과로 만들고 전차와 자벽을 처음에 허락한 것은 실로 조정이 변진(邊鎭)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조용할 수 있는 자리가 좁아져 이렇게 구근을 하고도 낙사하는 일이 있으니, 장려하는 뜻에 있어 향우지탄(向隅之歎)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감히 사유를 갖추어 급히 장계(狀啓)를 올립니다. 상항(上項)의 동래부 구검감관과 남수문장 구근과는 모두 동래부가 청보(請報)한 대로 시행하기를 허락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